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1. 이끄는 글
이 물음은 잠들어있는 우리 성도의 의식에 경종을 일으키게 하며 진리의 본질로 이끌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이는 우리에게 이미 전달된 진리의 참 의미를 깨닫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다시금 고백적인 방식으로 각성케 하시는 방법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처럼 질문을 던지시고 그 해답의 세계인 진리의 세계로 여행하게 하신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예수를 정면에서 세 번씩이나 부인하며 세속적인 욕망과 기대로부터의 자괴감과 낙심에 빠져 있던 시몬 베드로에게 찾아오셔서 하신 예수님의 질문, 즉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질문이었다.
2.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후, 실의에 찬 제자들은 각자 흩어지게 되었다. 가롯 유다는 은 삼십에 예수님을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손에 넘겼고, 주님을 위하여 목숨을 내어 놓겠다던 베드로는 어려움이 닥치자 그를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했다. 다른 제자들 역시 혼비백산하여 흩어졌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보다 먼저 디베랴 바다에 가 계셔서 그들을 보살폈다. 이 땅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하나님의 권능의 손길이 아닐 수 없다.
요한복음21:12에서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와서 아침을 먹어라.” 하시니, 제자들 중 아무도 그 분께 “당신은 누구 십니까?” 라고 묻는 자가 없었으니, 이는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알았기 때문이다. (이 역시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과 함께 하셨던 일로써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야할 자신의 때가 이르신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던 것을 기억나게 하신 것이다.)
15절―19절에서, 그들이 아침을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시기를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그가 예수께 말하였다.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 어린 양들을 먹여라.”하셨다.
예수께서 다시 그에게 두 번째 말씀 하시기를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그가 예수께 말하였다.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 양들을 쳐라.”하셨다.
예수께서 그에게 세 번째 말씀하시기를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예수께서 그에게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 하느냐?’라고 말씀하시므로 그가 근심이 되어 말하였다. “주님, 주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 양들을 먹여라.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네게 말하는데,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를 띠고 네가 원하는 곳으로 다녔으나 네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겠고, 다른 이가 네게 띠를 띠워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라고 하셨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베드로가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신 것이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오너라.”라고 말씀하셨다. 이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시는 질문의 요지는 오직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이다. 세 번씩이나 동일한 질문을 통해서 강조된 행간의 의미의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향한 이기적 사랑의 독점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독선적 의미의 표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세 번째 같은 물음이 있은 후 매우 근심한 베드로의 답변은 ‘주님, 주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를 전제한 후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십니다.’라는 고백적 의미다. 따라서 자신이 거침없이 약속했던 과거 실패의 전력을 통해서 스스로는 결코 주님을 사랑할 수 없음을 깨닫고 나오는 고백이다. 즉,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고 언약대로 오신 성령의 나타남이 없이는 인간 스스로의 의지와 결단으로는 결코 주님을 사랑할 능력이 없는 무능한 존재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의 의미는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십자에 못 박히시고 죽으신 후 성경대로 삼일 만에 부활하셨음’을 진정으로 깨닫고 확신 하느냐?는 뜻이다.
그리고 그 사랑에 대한 물음의 응답은‘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성도들에게 우리로 하여금 찾아가 전하라는 의미로 귀결된다.
3. 맺는 글
예수님의 비수(匕首)같은 질문은 인간이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인간적 자존심(自尊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폭로하고 거룩한 진리 앞으로 인도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임을 통찰케 하신다. 자기를 드러내기 위하여 스스로를 높이고 포장하기에 이르는 육신의 소욕은 패망과 절망에 이른다. 이는 스스로 자기 안에 왕으로 군림하여 세속적인 지배구조 관계를 형성한다. 따라서 긴장관계로 인한 단절(斷絶)의 벽(壁)을 만든다.
그러나 진리에 입각한 인간의 진정한 자존감(自存感)은 성령의 소욕을 바탕으로 항상 승리와 내면에 영원한 소망을 갖게 한다. 자기를 드러내기 보다는 그리스도의 몸이 세워지기를 바라는 열망이 있다. 또한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통치로 인한 거룩한 교회의 지체관계를 형성하며 그리스도의 마음과 섬김의 체제 속에서 평강을 누리며 소통의 교제 안에 있게 됨을 알 수 있다.
성령의 능력은 우리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물음 앞에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셨음을 고백케 한다. 이는 우리의 정체성의 근거가 된다. 이를 통해 내면 깊숙이 나의 존재의 의미를 확인하게 해주며, 그것은 결국 삶의 근원적인 동기를 부여하는 산 소망의 능력을 갖게 하신다. 이는 허탄한 자존심으로 포장된 비 진리(유대주의,세속주의,적그리스도)와의 투쟁에서 최후 승리의 삶을 살 수 있게 하시며 모든 일을 통해서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게 하신다. 아멘
|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
거지라서 행복해요, <무장원 소걸아> |
한 겨울의 특별한 7시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