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과 기본을 지키려 했던 한 ‘인간’의 이야기
영화 <변호인>
한홍구의 [대한민국史]라는 책에서 이런 내용을 본 적이 있다. ‘프랑스의 혁명에는 국민들이 손수(?) 왕과 왕비를 단두대에 세우고 형을 집행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혁명에는 그러한 과정이 없었다. 그래서 개별적으로 받아들이는 민주주의에 대한 개념이나 정의가 희미하다’. 확실하진 않지만 대략 이런 논조였던 것 같다.
그렇다. 독재자를 우리의 손으로 직접 처형하는, ‘피’를 보는 카타르시스가 우리 민족에겐 없었다. 그래서 분노와 화가 많고 한이 켜켜이 쌓여있다는 생각이 든다. 독재 타도, 민주 수호라는 기치를 내걸고 거국적인 ‘혁명’의 바람이 불었을 때도 그것은 좌절되거나, 또 다른 이름의 독재 앞에 허탈함을 느껴야했다. 조금 다른 얘기지만, 우리나라가 월드컵 기간에만 붉은악마라는 이름으로 집단 광증의 축제에 참여하는 것도 이렇듯 묵은 한에 대한 속풀이가 아닌가 싶다. 해소되어야 하는 순간에 해소되지 못한, 가슴을 프레스로 압박하는 듯한 그 갑갑함을 이번 영화 <변호인>에서 또 한 번 느꼈다.
<변호인>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한 인물(故노무현 대통령)의 영화다. 취미생활이 요트타기일 정도로 ‘잘 나가던’ 변호사가 고생길 훤한 ‘인권 변호사’로 전향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사실, 노무현이 한국정치사에서 차지하는 무게만큼 이 영화를 둘러싼 다양한 관심들 또한 상당히 시끄러웠다. 그 갑론을박에 끼고 싶지도 않았을 뿐더러, 개인적으로 애정이 있는 인물에 대한 소란이 피곤해 외면했던 영화였다. 한 가지 위안을 얻었던 건, 국민호감인 배우 송강호가 주연을 맡았다는 점이다. 또한 일대기 형식의 영화가 대부분 지루함을 견디기 힘들도록 만들어진 반면, <변호인>은 나름의 짜임과 구조가 있고 유머도 넉넉했다. 굳이 노무현을 엮지 않고, 한 개인의 휴먼 드라마로 봐도 무난한 감동을 얻을 수 있다는 것.
이 영화에서 가장 주목할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송강호의 괴물같은 연기이다. 후반의 법정 씬은, 몇 번이고 다시 보고 싶을 만큼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고문담당 형사 역을 맡았던 배우 곽도원에게 심문을 하며 서로 신경전을 벌이는 장면. 형형하게 부릅뜬 두 눈에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처럼 날이 선 붉은 핏발. 그 위로 차오르기 시작하는 눈물. 둘은 ‘애국’에 대한 각자의 정의와 신념이 충돌한, 아주 팽팽한 신경전을 벌인다. 이 대목에선 극장 안이 물을 끼얹은 듯 고요했다. 배우의 기세에 관객이 완전히 눌려버렸다는 표현이 정확할까.
또 다른 부분에서 생각할 거리였던 것은, 저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앞서 말했던 그 울분과 억울함을 어떠한 모양새로 간직하고 있을까 하는 점이다. 나라면 저 아픔을 어떤 식으로 처리했을까도 궁금해졌다. 아무리 말씀을 가지고 있고, 그 말씀이 천하무적이라고 해도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까. 도리어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는 건 아닌가. 우리는 자신의 기억 하나 통제하지 못하여 트라우마와 콤플렉스라는 이름의 흉터를 안은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미약한 존재임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절대 진리와 절대 선함, 그리하여 절대적인 강함이라는 것은 이 모든 고통에 초연하여 초월한 상태이지만, 피조 세계에 사는 동안은 결코 그것을 ‘완벽하게’ 누리지 못할 것이란 생각에 살짝 슬퍼지기도 했다.
이상한(?), 그리고 늘 똑같은 결론일지 모르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나 자신을 알고 신을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나의 역사, 내가 고통을 겪었던 시기와 시점, 고통의 농도, 그 고난을 내려준 신의 의도와 목적. 파고들어서 샅샅이 들여다보면, 내가 갖고 있는 아픔이 과장 혹은 곡해되었다는 걸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직면하여 올바르게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큰 성과를 얻을 수 있다. 괴롭지만 그러한 작업을 꾸준히 해나가다 보면,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를 통해 그려온 하나님의 섭리를 보는 눈이 뜨여지고, 이해와 인식의 폭이 넓어지니 자연스레 평화가 찾아오게 되지 않을까.
여하간, 작금 역시 억압의 시대임은 부정할 수 없다. ‘상고출신, 부산, 인권변호사’라는 키워드가 노무현을 노골적으로 가리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작사 측은 이를 홍보에 적극 이용하려 하지 않았다. ‘현 정부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도 아닌데 우리는 이토록 엄혹한 현실에 처해있다’며 기자들은 이를 외압에 대한 공포라고 짚어냈다. 내 자식을 이런 세상에서 살게 하고 싶지 않다던 송강호에게, ‘내 자식은 유학 보낼 거니까 괜찮다’고 응수하던 오달수를 보며 박장대소했지만 곧 씁쓸함이 밀려왔다. 상식이 통하는 세상에서, 상식적인 사람들과 살고 싶다는 건 아직 불가능한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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