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을 통한 치료 <메리와 맥스>
호주에 사는 여덟 살 소녀 메리. 그녀는 이마 한 중간에 거름색 모반이 있는 왕따 여자애다. 아빠는 공장에서 녹차의 티백을 붙이는 일을 하고 엄마는 알콜 중독자이다. 메리는 우연한 계기로 맥스와 펜팔을 시작하게 된다. 맥스는 뉴욕에 거주하며 고도비만에 정신적 질환을 앓고 있는 중년 남성이다.
메리는 학교에서 자신을 괴롭히는 못된 남학생에 대해, 도벽이 있는 엄마에 대해, 광장 공포증을 가진 이웃아저씨에 대해, 애완용 수탉에 대해 이야기한다. 답장을 쓰며 맥스는, 자신도 모르게 벽이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음을 느낀다. 하지만 정상적인 사회에서 고립되어 애인과 친구도 없이 평생을 살아온 그에게, 벽을 허무는 일이란 결코 쉽지 않다. 메리에게 답장을 쓰면서 그는 생명을 위협하는 수준의 정신적 압박에 부딪힌다. 그래서 펜팔이 몇 달 동안 중단되기도 한다.
똘똘하고 영리한 메리는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그녀는 자신의 친구인 맥스의 정신질환에 대해 연구하고, 그와 주고받은 편지들을 토대로 한 논문을 발표한다. 그리하여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자신의 이름을 건 책을 출간하게 되지만 맥스는 이에 큰 배신감과 분노를 느낀다.
오랜 시간을 두고 맥스는 결국 메리의 사과를 받아들인다. 메리는 남편과의 이혼 후, 아이를 들쳐 업고 맥스를 처음으로 찾아가지만 그녀를 맞이하는 건 싸늘하게 식어있는 맥스의 주검이었다. 그리고 메리는 발견한다. 맥스의 집 벽면부터 천장까지 가득 붙어있는, 자신의 편지들을.
치유는, 기술이 아닌 우정을 통해 가능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내가 상대방을 고쳐야겠다고 마음먹는 순간 치유는 진정한 힘을 잃는다. 그것은 환자를 대하는 의사의 자세이지 친구의 자세가 아니다. 우정은 평등하다. 내가 먼저 나의 아픔을 내보이고 조언을 구할 때, 상대방도 마음의 경계를 무너뜨리지 않을까.
아픔을 겪는 이에게 ‘다 하나님의 뜻’이라며 쉽게 가르치는 모습을, 나는 말씀운동 안에서 종종 목격했다. 아픔 뿐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니 그런 식의 조언은 무의미한 듯 싶다. 당사자에게 필요한 건 조언이 아닌 위로다. 나 역시 나에게 닥친 시련은 크게 여기고 남에게 내린 고난은 하찮게 여기는 실수는 하지 말아야겠다.
다른 맥락의 이야기지만, 나는 맥스의 불행이 내게서 매우 동떨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같은 아픔을 겪어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방식, 해석하는 방식이 출발부터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비신앙인인 주변 지인들의 아픔에 대해 심정적인 동조는 있지만 근본적인 공감을 하지 못하는지도 모르겠다. 하나님을 모르는 그들에게,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위로는 침묵보다 못할 것이다. 그들에겐 기껏해야 방법론을 제시해주거나 감상적인 호응 밖에 할 수 없어서 안타깝고 가끔은 피곤하기도 하다. 진정한 하나를 함께 알고 나누고 공감한다는 것에 새삼 감격했다. 우리가 무엇을 나눔에 있어서는,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한 지리멸렬한 설명이 필요 없으니.
메리와 맥스의 우정을 초월하는, 소중한 인연을 선물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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