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에서 부치는 10번째 편지
어느 나라든 다 그렇겠지만 넓은 땅덩이의 인도는 도시마다의 색깔이 특히 더 분명한 것 같습니다. 이번에 찾은 도시는 요가의 본고장 리쉬께쉬. 힌두교의 성지로 유명한 이곳에서 인도 정통 요가나 맛볼까 하고 고개를 들이밀었지요.
한국 돈으로 5천원 정도 하는 숙소에 짐을 풀려는데 벌레의 사체가 하얀 시트 위를 장식하고 있었습니다. 창문 틈새로 쏟아져(?) 들어오는 날벌레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방 안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며 날뛰는 귀뚜라미를 피해 저 또한 방 안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며 날뛰느라 거의 혼이 나갈 지경이었어요. 인도에서 싼 데는 정말로 싼 값을 한다는 매우 값진 교훈을 얻고 하루 만에 다른 곳으로 옮겼습니다. ‘아쉬람’이라는 곳인데요, 숙식과 요가 수업을 제공하는 요가 수련원 정도라고 보시면 돼요. 제가 묵은 곳은 스와난다 아쉬람. 뭇 훤칠한 독일여성과 룸메이트가 되어 한 방을 쓰게 되었습니다.
요가에 대한 관심과 열기가 얼마나 뜨거운지는, 수련복을 맞춰 입고 시종일관 진지한 태도로 모든 일정에 임하는 외국인들을 통해 알 수 있었어요. 함께 생활했던 인원이 거의 50여명 정도 되었는데 저와 서넛의 일본인을 제외한 나머지가 모조리 다 유럽인들이었습니다. 제가 받은 충격은 그때부터가 시작이었습니다.
기름기와 소금기가 거의 없는 웰빙식으로 본의 아니게 건강을 챙기게 되었는데요, 식사를 하기 전 이들은 단체로 손을 모으고 눈을 감고 힌두 신에게 식전 찬양을 올립니다. 찬양이 끝난 후 혼자 당연하게 아멘을 외치긴 했지만, 도대체가 뜻을 알 수 없는 이 기분 나쁜 노래가 무엇이기에 다들 저리 평화로운 표정으로 입을 모으는지 영 찜찜하더라구요. 미간을 찌푸리고 예리하게 분석하는 척 하다가 맛있는 음식에 금세 정신이 팔렸습니다.
이 아쉬람에서 행해지는 요가수업은, 제가 동영상으로 종종 따라하곤 하던 한국에서의 요가와 매우 달랐습니다. 연예인 혹은 유명인의 이름을 딴 우리나라의 요가 비디오는 보통 미용이나 운동의 성격이 강한데, 인도의 요가는 종교색이 매우 짙습니다. 한 체위 한 체위가 신을 향해 경배하고 신과 합일하기 위한 경건함과 간절함으로 점철되어 있지요. 특히 요가 시작 전 ‘옴’이라는 단어로 흉부를 울리며 내는 깊은 소리-신을 부르는 주문-은, 적요하고 어두운 수련실을 더욱 섬뜩하게 만들었습니다. 몸살이 날 정도로 몸을 이리 찢고 저리 찢고 하는 중에 또 다시 눈을 빛내며 관찰에 몰두했지요.
6세 때부터 요가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고 하는 인도인 지도자의 리드를 따라 기를 쓰며 자세를 갖추는 서양인들 말이에요. 세계를 주름잡다 못해 땅 놓고 땅 먹기 게임을 하며 자기들 마음대로 식민 지배를 하던 이 대단한 나라의 후예들이, 우스꽝스러운 영어 발음의 인도 지도자 한 마디에 숨을 쉬고, 큰 웃음을 웃고, 몸을 틀고 하는 모습이 참 아이러니 했습니다. 뭐 대단한 거라도 있는 양 태양을 향해 가슴을 열고 눈을 감으며 무언가를 느끼려고 하는 사람, 우월한 백인의 상징인 하얀 피부에 ‘옴’이라는 인도글자를 새기고 단호하게 입을 다문 사람, 엄숙한 표정으로 식사에 임하는 사람. 이들 모두가 이곳에서 정신과 육체를 모두 바쳐 진짜 요가를 배우기 위해 돈을 지불하고 기꺼이 걸음 한 것이겠지요. 지칠 줄 모르는 제 안의 호기심이 또 고개를 들었습니다. 저들을 이끈 데에는 매혹적인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그게 무엇이기에 끌렸던 걸까, 알고 싶다. 궁금해! 뭐, 그래봤자 이 진리에 비한다면 다 흰소리에 불과하겠지만요.
저녁에는 푸자(힌두신에게 드리는 예배)를 위해 강당에 모였습니다. 촛불 두 개를 켜 놓고 둘러앉아 하는 거라곤 쉬운 멜로디의 노래를 대여섯 곡 함께 부르는 것 뿐. 입을 꾹 다물고 투명 인간처럼 앉아있던 제가 거슬렸던지 독일 친구가 그러더군요. 자기도 크리스찬인데, 지금 부르는 이 노래는 각자 자기가 믿는 신을 향해서 부르면 되는 거라며 굳이 힌두의 신을 찬양할 필요는 없는 거라 하더군요. 그게 함정이 아닐까 싶었어요. 이상하게 마음이 동하지 않아서 더 독불장군처럼 가만히 있었지요. 크리스찬이 힌두교인들에게 몽둥이로 두들겨 맞아 죽었다던 인도 어느 지방의 뉴스를 듣고, 무서워서 십자가 목걸이를 빼놓고 이곳에 왔던 제가 갑자기 왜 그렇게 비겁하게 느껴지던지. 힌두신의 이름이 들어가 있는 이 노래를 부르지 않는 것으로 내 손톱만한 자존심을 지키겠다며 아등바등했던 순간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방신을 믿고 우상을 숭배했던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었어요. 어떻게 야훼를 두고 그 따위 허접한 것들에 눈이 갈 수 있지? 하고 빈정거렸었는데, 나라 자체가 그러한 인도에 오고 또 그 현장에 오래 있다 보니 ‘그럴 수 있겠다, 정말로’하고 수긍이 되었습니다. 환경이 그러한데, 하나님이 마음 뺏기게 하시는데, 어쩌겠어요. 티끌만한 근심 하나 없는 얼굴로 찬양을 부르던 서양인들을 바라보며 저러한 사상과 종교에 현혹당하지 않게 해주셔서 참 감사하다는 생각이 진하게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었다면 저 또한 온유한 표정으로 알 수 없는 신을 찬미하며 세상 진리를 얻었다 착각하고 있었겠지요. 제가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농후한 사람임을 알기에, 더 두렵고 더 감사했습니다.
요즘 부쩍, 저를 자녀삼아 주시고 당신의 일에 써주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 곱씹게 됩니다. 이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내게 손해라고 했던, 예전엔 무척이나 큰 갭이 느껴졌던 바울의 말이 정말 사무치도록 실감이 납니다. (그러니까 손해 안 당하게 열심히 하세요, 하고 팔짱 끼고 관조했던 저였는데 말이지요.)
개인마다 갖고 있는 정서 혹은 투쟁의 대상이 있겠지요? 고독이나 권태 뭐 이런 것들… 저에게 있어 그것은 허무입니다. 야훼를 알지 못했다면 저는 아마 평생 허무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비관적으로, 염세적으로 살다가 일찍이 생을 마감했겠지요 흑흑. 그렇게 ‘내어 버려두지’ 않아주셔서, 고통스러울 때 고통스럽더라도 위안 얻을 곳을 마련해주셔서 참 감사합니다. ‘아버지’라는 단어가 어색했는데 ‘하나님 아버지’가 친근한 요즘입니다. 아부지, 인도에서 남은 시간동안 크리스찬으로써의 긍지와 자부심을 ‘끼치고’다닐 수 있도록 애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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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서 부치는 열한 번째 편지, 너희는 빛의 자녀라 |
온 세상을 캄캄하게 하셨어요. (7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