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망과 신념의 충돌 <하얀거탑>

뛰어난 실력의 젊은 의사가 있다. 자이젠 고로. 나니마 대학병원의 간판이라 할 수 있는 짱짱한 스펙을 가진 의사다. 그의 스승이자 외과 교수인 아즈마는 함께 인터뷰를 하고 사진을 찍어도 귀퉁이로 밀려나 흐릿하게 나오거나, 거물급 VIP들의 중요한 수술을 자이젠에게 의뢰할 것을 부탁받는다. 은퇴 전까지 그의 임기가 남아있음에도 의료국이나 병원 관계자들은 벌써 자이젠을 교수로 인정하는 분위기다. 거기에, 야망을 숨기지 않는 자이젠 덕분에 그의 심기는 불편해진다. 결국 그는 타 대학병원에서 자신의 후계자를 선출하기로 결심한다.
자이젠은 모든 인맥을 동원하여 교수가 되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 이에 장인어른이 결정적인 도움을 준다. 교수 사위를 두고자 하는 야심 탓이다. 그는 교수 선출에 투표권이 있는 의사들을 돈과 자리로 매수하기에 나선다. 
자이젠과 이념적으로 대립하는 캐릭터는 사토미다. 자이젠의 동기인 그는 신념으로 움직이는 사람이다. 그에게는 환자 한 사람이 소중하다. 의사가 걸치는 외피보다 의사로서의 본분과 생명을 중요시 한다. 그래서 그에겐, 야망을 위해 정치를 펼치는 자이젠이 이해되지 않는다.
사실 사토미의 신념은 대학병원의 시스템과는 맞지 않는다. 효율을 우선으로 여기는 그 곳은, 말기암 환자에 대한 처우까지 신경써줄 여력이 없으므로 내보내자는 양적 공리주의고, 사토미는 말기암 환자라도 그가 원하는 심리적 치료나 안정까지 대학병원에서 제공해줄 수 있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렇게 사토미가 추구하는 가치와 그가 몸담은 조직의 가치(자이젠의 가치와 대부분 일치하는)는 언제나 충돌한다.
그리고 이 충돌을 지켜보는 자이젠은 내색하지 않지만 괴로워한다. 다른 일에는 일체 관심이 없고 의사가 할 일에-연구와 환자치료-만 몰두하는 사토미는 때론 외골수 같고 답답하긴 하지만 ‘진짜’이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의사로서의 존재 이유는, 환자에게 무엇을 어떻게 어디까지 해줄 수 있는가, 해주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다. 수술만 해주면 끝 이라는 -물론 최고의 실력자이므로 최고의 수술을 해준다는 자부심이 있지만- 자이젠에게 사토미의 진지한 고민들은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는 자신에게 파동을 울리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자이젠은 고군분투 끝에 교수가 된다. 드라마의 중반까지 전력을 다했던 일임에도 그는 썩 기뻐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한 구석이 허물어지는, 허탈한 웃음 따위를 짓고 있다.
연구와 환자밖에 모르던 사토미도 공로를 인정받아 연구 성과와 관련해 상을 받고 강연을 하게 된다. 윗선의 정치의사들로부터 ‘꽉 막힌 친구’라는 비아냥을 듣던 그가, 자신과 비슷한 일념을 가진 노교수에게 인정받아 결정적인 도움도 받게 된다.
‘내 할 일만 하면 된다’는 명제가 명백히 힘을 발한다. 바싹바싹 피가 마르게 로비하지 않아도, 착실하게 내 본분에 충실해나가면 된다. 본분이 아닌 것에 곁눈질을 하고 욕심을 내니 머리가 아픈 거다. 의학 드라마의 옷을 입은 이 정치 드라마를 보며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사람 마음이 내 뜻대로 되지 않으니 돈을 풀고 권력을 약속하고, 그렇게 ‘엮인’ 관계가 시작되자 받은 만큼 돌려주기 위해 투자한 만큼 얻어내기 위해 심리전을 벌이고… 그 고단한 세계에서 살면서 ‘여호와의 뜻대로 된다’는 항체를 갖고 있음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야망보다 신념을 지키는 것이 더 어렵고 가치 있다는 생각을 한다. 신념은 외로움과 고난을 동반하기 마련이나 쉽게 꺾이지 않는다. 신념이기 때문이다. 타협하거나 비굴하게 굴 필요도 없다. 어차피 하나님의 뜻대로 될 일이라면 될 것이고, 아니라면 무릎을 꿇고 빌어도 안 될 테니까. 갖은 술수가 난무하는 이 땅에서 신념을 지킬 수 있는 힘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