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 누구냐 넌?
<기생수>
어느 날 지구에 떨어진 테니스공만 한 크기의 괴생물체. 껍데기가 갈라지고 틈에서 나온 조그마한 뱀 같은 것이 근방의 주택가에 거주하는 인간의 귀, 콧구멍, 입으로 들어간다. 그들은 그렇게 뇌를 점령한 후, 인간 행세를 한다. 책 속에서 그들을 ‘기생수’라 부른다. 기생수는 순식간에 타자를 공격할 수 있다. 인간이 보편적으로 느끼는 감정이 그들에겐 부재하며 그런 까닭에 매우 냉혹하고 합리적이다. 즉, 불필요한 감정 소모로 인해 발생하는 일들이 거의 없다는 얘기다. 그들이 인간을 공격하는 이유는 하나 ‘식량’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다른 생물을 먹고 살아가듯 그들도 무언가를 먹어야 살아갈 수 있다. 불행하게도 그 ‘무언가’가 인간이고, 이 지점에서 작품 전반에 팽팽한 긴장이 발생한다.
주인공 신이치라는 소년에게 침투하던 괴생물체는 뇌 점령에 실패하고 오른팔에 기생한다. 그의 애칭은 ‘오른쪽이’. 각각 다른 종이 각자의 사고체계를 갖고 한 몸에서 살아가기에 이들에게는 공존이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 우습게도 둘은 ‘지체’다. 머리가 두 개라는 부분이 함정이긴 하나, 목표가 같기에 신이치와 오른쪽이는 한 몸에 붙어있는 두 몸을 지혜롭게 사용할 줄 안다. 상대방이 있어야 내가 존재하므로 서로를 보호해 주고 성장시켜 준다. 그들의 목표는 인간을 무차별 살해-기생수의 입장에서는 식사-하는 기생수들을 처치하는 것.
그 과정에서 신이치는 기생수로 인해 어머니를 잃기도 하고, 인간의 아이를 낳은 기생수와 연이 닿아 그녀에게서 가르침을 얻기도 하며, 친구들의 죽음을 목격하고 국가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 나서야 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신이치는 삶과 죽음, 인간의 존엄성, 생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을 끊임없이 하게 된다.
흑백으로 된 지면이지만 1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에 몸이 분해되어 죽는 사람들을 보며 신이치와 같은 생각을 했다. 인간이란, 생명이란 대체 무엇일까. 저토록 허무한 죽음을 맞기 위해 죽기 전까지 살아 있어야 했던 걸까. 그리고 우리는 왜 인간의 죽음엔 기함을 하면서 다른 생물의 죽음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걸까.
신이치는 갈등한다. ‘인간과 그 밖의 생명의 기준은 누가 정해주는데?’ 지구의 입장에서 보면 땅과 바다를 차지하고 매일 살육하며 자신의 종만 번식시켜가는 인간이 독이다. 인간의 수가 조금만 줄어든다면 다른 생물이 좀 더 행복해질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런 연유로 기생생물이 내려왔으나, 인간은 자신들의 죽음을 막기 위해 허덕일 뿐이다.
우리 모두가 기생수가 아닐까 하는 것으로 이 책에 대한 결론을 내렸다. 자연에 터를 잡고, 무언가에 기대어 살며, 다른 생물을 잡아먹는 것으로 생을 연명하는. 결코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그러나 결코 사그라지지 않는 충만한 반항기(?)로, 몇 가지 질문을 던져 보고 싶다.
인간은 너무 제멋대로 지구를 독식하는 건 아닌가. 왜 인간만이 존엄하다 생각하고 주인 행세를 하는 걸까. 그 출발이, 창세기 1장 28절 때문은 아닌가. 지구상의 모든 생물들은, 그저 하나님의 언약을 위한 인간(그나마도 도구인)의 배경화면에 불과한가. 왜 인간은, 생물은 홀로 살아갈 수 없나. 하나님만이 스스로 완벽하게 존재하신다는 것에 대한 불편한 계시인가. 많은 시간을 들여 고민했던 것들이지만 막상 글로 옮기다 보니 허무해진다. 가끔 무거운 질문들이 내면에 가라앉아 있다가 한 순간 ‘왜 그걸 고민했지?’하고 쉽게 풀리며 어이없어질 때가 있다. 지금이 그런 것 같다. 인본주의에서 신본주의로 왔다 갔다 하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것을 다 알며 젠체하는 신본주의자는 되고 싶지 않다. 적어도 이러한 고민들을 마주했을 때 ‘하나님’이란 답만 확인하고 넘어가는 태도는 버려야지. 아무튼 이 땅 위의 살아있는 것들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해주시는 ‘생명’에 대한 비밀은 무엇인지 생각해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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