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작성일 : 13-01-15 23:00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성찬(聖餐), 예식(禮式)으로 시행해야 되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고전 11:24~25)

성찬(聖餐)은 언제부터인가 기독교예배의 전형이 되었고, 준엄하고 경건한 예식으로 변모했다. 교단과 교회마다 시행하는 횟수는 다르지만 만찬(晩餐)을 의식(儀式)화하는 제도에는 일치하고 있다. 거기에는 순서가 정해져 있고, 집례자들과 참여 대상이 한정되어 있으며 평상시의 예배보다 특별한 권위를 부여한다. 즉, 예수께서 죽기 전날 시행하신 마지막 저녁 식사가 내용적인 의미보다는 형식적인 의식에 치우쳐 본질이 훼손되고 있음을 뜻한다는 말이다.
만찬의 본질은 기독교인들이 식사할 때마다 그리스도의 오심과 죽음과 부활을 기억하고 생각하는데 있다. 여기에는 특별한 의식이나 절차가 가미되지 않았으며,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신자이면 누구나가, 먹을 때마다, 그라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記念)하는데 의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일상적인 만찬이 성스러운 의식으로 탈바꿈했으며, 특별한 예전의식에 의해서 제도화되었다. 성찬식의 집례자는 반드시 가운을 착용했고, 화려한 기구들을 사용하여 엄숙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이와 같은 성찬예식은 로마 카톨릭의 성사(聖事)와 별반 차이가 없으며, 의식화된 예배의 전형이다. 용어개념부터 살펴보면, 성찬(聖餐)은 성스러운 의식과 의미가 가미된 예식을 뜻하고, 만찬(晩餐)은 손님들과 함께하는 보통의 저녁 식사이다. 성경에는 식사 자체가 거룩함을 내포하고 있지는 않지만,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저녁을 드시면서 메뉴인 빵과 포도주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바 있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의 성찬식처럼 예배의식의 한 형태로서 예전(禮典)화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
성경에는 만찬에 관한 내용이 마태복음 26장 26~29절, 마가복음 14장 22~25절, 누가복음 22장 15~20절, 고린도전서 11장 23~28절에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 나타난 중요한 논점은 첫째, 만찬은 의식적인 예전(禮典)이 아니라 유대인의 단순한 식사문화였고, 둘째, 식사 자체의 비중보다는 식사를 통한 의미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즉, 예수께서도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8),라고 말씀하셨으며,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 22:19)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부여하신 만찬의 의미는 죽음이 임박한 가운데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교훈하신 것인데, 이는 선생이 죽더라도 제자들은 먹을 때마다 항상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잊지 말고 기억하며 살 것을 권고하는 말이다. 그래서 유대인의 주식인 빵은 당신의 몸으로, 포도주는 당신의 피로 의미를 부여하면서 실물교육을 실시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 시행하신 만찬은 예식과 절차보다는 구속사역의 의미를 기념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음이 확고하다.
또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잘못된 식사문화를 책망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이 갖는 만찬의 의미는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전 11:25)는데 있으며,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 11:26)고 언급하고 있다. 바울은 당시 고린도교회에서 가난한 자와 부자간의 이질감 때문에 건덕이 훼손되는 문제가 발생하였으므로 이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 것이다. 교회의 모임은 식사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데 주안점이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성경에 언급된 대로 만찬은 거룩한 의식이 아니라 구속의 의미가 중요하며, 특정한 시기가 따로 지정된 것이 아니라 먹을 때마다 그리스도의 사건을 잊지 않고 기념하는데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들은 성경에 면밀하게 기록되어 있으므로 의미에 대한 인식은 성경학습을 통해서 충분하다. 특정한 날을 정해놓고 의식화된 형식을 갖추어 시행하는 성찬예식은 성경의 취지와도 어긋난 것임을 알 아야 한다. 성찬예식이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을 증거하는데 주 된 목적에 있다면, 성경자체를 체계적으로 공부하는 것이 훨씬 더 효율적일 것이다.
예수께서도 식사문화를 통해서 구속사역을 설명하셨고, 바울 역시 고린도교회의 그릇된 식사관행을 바로잡기 위해서 구속의 의미를 강조한 것이다. 여기에서 핵심쟁점은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식사 때마다 구속사역의 의미에 방점을 두고 있다는데 주목해야 한다. 이 말은 의식을 통한 의미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구속사역의 내용을 통해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확증하는데 주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만찬이 의식을 통한 의미부여라면, 식사 때나 아니면 예배시마다 성찬예식을 거행해야 옳을 것이며, 성찬뿐만 아니라 발을 씻기는 세족식도(요 13:1~11) 함께 병행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말씀강론이라는 예배의 본질은 퇴락되고 교황주의자들의 미사와 같이 의식만이 부각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구약의 의식화된 형식을 탈피하고 성령과 진리에 의한 예배의 패러다임을 선언한 바 있다(요 4:24).
예수께서 제시한 신약의 예배는 시간과 공간과 형식을 초월한 새로운 변혁이다. 구약의 예배는 예루살렘이라는 한정된 공간과 정해진 시간과 다양한 절차와 의식에 따라서 드려야 한다. 하지만 신약적인 예배는 언제 어디서나 어떠한 형식과 제도에 구애받지 않으며, 진리의 말씀을 공부하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데 있다(롬 12:1~3). 성경적인 영적예배는 어떠한 의식이나 형식이 제도화되어 개입되어서는 안되며, 성경공부와 성도의 교제에만 주력하는데 있다.
초대교회의 예배는 공적(公的)과 사적(私的)의 성격구별이 없었으며, 가정과 회당의 장소에 연연하지 않았고, 복잡한 절차나 의식이 전무했다. 오직 성경을 공부하는데 주력했고, 성도들이 피차 교제를 이루며 교회를 세워갔었다. 그러나 기독교예배는 4세기 콘스탄티누스의 정치적인 전략에 의해서 절차가 강화되고, 다양한 의식과 형식에 치우치며, 화려하고 웅장한 형태로 전락된 것이다. 이것이 중세를 거치면서 교리적으로 제도화되었고, 정치적으로 세력화되어 부패로 일로를 걷게 된 것이다.

단순한 저녁 식사를 절차와 의식을 개입시켜서 미화하거나 신성시하면 안 될 것이다. 빵과 포도주를 식재료 이상의 신성한 의미를 가미시켜도 안 될 것이다. 의식과 재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식사를 통해서도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기독교적인 식사문화에 의의가 있음을 강조해야 할 것이다.

(재)성경신학연구소 전문연구위원 김승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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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힘<38>
전국에 흩어져 있는 지체들을 찾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