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그리고 여자에 대한 단상>
4남 2녀의 장녀로 태어난 나는 배운 것은 없어도 참으로 지혜로운 어머니 덕분에 심한 가난 속에서도 아들과 딸의 구별로 인한 억울함을 느끼며 자라지는 않았다. 그러나 남녀차별이 존재했고 또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은 학교에 다니면서 배운 국사나 세계사를 통해, 또 막 눈뜨기 시작한 독서를 통해, 그리고 가난으로 아들은 학교에 보내고 딸은 공장을 다니는 이웃들을 보면서 알게 되었다.
가부장제의 가정이나 남성 중심의 사회 체제, 힘(남성의 상징) 중심의 국가나 세계 체제를 알게 되면서 나의 분노나 절망은 깊어갔다. 능력은 같아도 여자이기 때문에 안되었고, 같은 잘못을 해도 남자에게는 관대하며, 여자에게는 엄한 현실이 존재했다. 좋은 음식, 좋은 옷, 좋은 잠자리는 남자 몫이었고 허름한 것은 여자 몫이었다. ‘여자가 그래선 안된다’는 제약 항목이 너무 많았고 어머니들은 이를 딸에게 전수하며 부덕이라는 미명으로 당연시했다. 여자는 남자에게 종속되어 오직 자녀를 낳아 기르고 집안에만 갇혀 생산 활동에는 참여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으니 무능력자(?)로 전락되고, 오로지 아내와 엄마의 이름만 주어질 뿐 개인의 성취는 전혀 이룰 수 없었던, 그리하여 사회적 약자로 억울한 세월을 살아올 수밖에 없었던 사실들이 나를 슬프고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꾸준한 여성 해방 운동과 여성의 자각은 농경 사회나 산업사회처럼 힘(남성)을 필요로 하지 않는 정보화시대와 맞물려 여권의 눈부신 변화를 가져왔다. 이제는 사회의 각 분야에서 남성과 어깨를 같이하는 많은 여성을 보는 것이 어렵지 않은 사회가 되었으나 여기에도 문제점이 노출되기 시작했다. 물론 조금 과장되고 개그적인 냄새도 나지만 ‘간 큰 남성시리즈’, ‘삼식이 시리즈’가 말해주듯 남성들의 가정 내의 위치가 축소되고 마치 돈 버는 기계처럼 돈으로 남성의 가치가 결정되고 비교당하면서 당당했던 어깨들이 축 쳐져서 가엷게 보이기도 하고, 짊어진 삶의 무게는 연민을 느끼게도 한다. 이상하게도 남녀의 권익이 역전되는 듯한 이 모습이 통쾌한 것이 아니라 ‘남과 여란 도대체 무엇인가?’ 참으로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남자와 여자를 만드신 하나님은 이들을 차등적 또는 대립적 존재로 만드신 것인가? 아니라면 이들의 정체성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바로 성경에 해답이 있었다. 최초의 교회라 할 수 있는 에덴 교회에 하나님은 아담과 그 갈비뼈에서 취한 하와를 만드시고 이들을 한 몸 되게 하셨으니 이는 장차오실 둘째 아담 그리스도(남자)와 교회(여자)가 머리와 지체로 한 몸 되게 할 것을 예표적이고 그림자적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아담이 하와를 향해 ‘이는 내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라고 표현한 진한 사랑과 그리스도가 교회(택자들의 모임)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그 놀라운 사랑 앞에 자발적인 순종이 따르게 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가부장제 하에서의 남성의 군림이나 작금의 여성에 의한 남성 무력화도 모두 힘이나 상황으로 상대를 제압하려는 인간의 타락성에서 나온 것이지 성경적이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남자와 여자를 차별적이거나 대립적으로 만들지 않으셨으며, 그리스도(남자)와 교회(여자)가 한 몸 될 것을 피조세계는 상대적인 곳이므로 남자와 여자로 보여주신 것뿐이다. 즉, 그리스도 안에 남자와 여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것이다.
세상 어느 학문에서도 볼 수 없는 남과 여의 정체성을 성경이 이렇게 분명하게 밝혀주므로 참으로 통쾌하고 개운하다(참고한 성경은 성경을 하나님에 대한 계시로 보아 하나님 존재 확증, 속성 발견, 사역 방법을 밝혀 낸 언약성취사적 성경신학으로 해석된 성경을 바탕으로 했음을 밝혀둔다). 글: 이금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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