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작성일 : 13-02-04 23:14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성경 속의 인물(2) - 선물로 주신 제자의 삶, 마태


비좁은 계단이 정겹던, 이젠 추억 너머로 아스라한 종로서적 4층 인문 코너 아늑한 구석에서 시간을 잊게 하던 책 한 권이 있었다. 누구에게나 정신에 하나의 획을 그어주는 책이 있다던 파브르의 표현을 빌자면, 고(故) 함석헌 선생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와의 만남은 어줍은 역사지식을 뿌듯해하던 유치한 고교생에겐 기억이 아닌 판단이 역사가의 자격임을, 역사를 넘어 뛴 자리에서야 참 역사를 볼 수 있음을 새겼던 그 시절 배움의 한 획이었다.

‘믿는 자만이 뽑혀 천국에서 지옥의 영원한 고통을 굽어보며 즐거워하는 종교’란 서론 속의 독설(毒舌)에 동조하던 대학 초년은 오직 성경만을 참된 한 획으로 확신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누가복음 16장의 거지 나사로가 느꼈을, 아는 그 누군가가 지옥에서 올려다보며 한 방울 물을 갈구할 때 스며올지 모를 슬픈 부담감이 짓눌러왔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모든 아픈 것이 지날 것을 바라던 내게 바르트의 만인 구원론은 치명적인 휴머니즘의 유혹이었으며,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사 65:17)이라는 가르침을 그때는 바르게 깨닫지 못했다.

마태복음 19장 등에는 부자 청년의 안타까운 이야기가 나온다. 어려서부터 선한 마음으로 살고자 노력했던 그는 예수께 달려와 꿇어앉으며(막 10:17) 영생 얻기를 소망했으나, 예수의 답변은 네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이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는 막막한 것이었다. 행위 구원의 어리석음을 깨우치시려 하신 의도를 우선 깨달아야 하겠으나, 한편으로 비교를 이루는 것은 누가복음에서 이어 등장하는 삭개오의 경우이다. 조건 없이 그의 집에 머물러주신 은혜에 더하여, 모두가 아닌 ‘절반’을 나누겠다는 다짐에도 예수께서는 그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변호까지 해주시지 않았던가. 바울은 택정(擇定)의 근거에 대한 답으로 원하는 자도, 달음박질하는 자도 아닌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으로 말미암음(롬 9:16)을 명쾌히 깨우쳐준다.

인간 중심의 만인 구원, 행위 구원론은 마태라는 인물의 여정을 성경에서 살피는 것으로 더욱 근거의 궁색함을 드러낸다. 언약성취사적 성경신학에 있어 구조의 핵심으로 간주할 구절이자 구약 전체의 언약을 응축(凝縮)하여 신약의 그리스도 성취로 이어주는 필수 고리,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世系)’를 기록한 영광의 도구로 쓰임 받은 이는 40여 명의 성경 기자(記者) 가운데 인간적 배경으로는 가장 초라했던 세리 마태였다. 로마 정부에 바쳐질 각종 세목의 할당액 초과분이 생활비였기에 기생충처럼 동족의 고혈을 빨던 세리, 그가 예수와 조우한 곳은 가버나움 근처로 추측되는 한 세관(稅關)이었다.

부자 청년처럼 예수 앞에 열정으로 달려와 꿇어앉은 것도, 세리장 삭개오처럼 간절한 소원으로 뽕나무 위에 오른 것도 아니었다. 그가 마주했던 현실은 언약된 표적을 행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 제자들의 영접이 아닌, 그 무리에게서 받아내야 할 통행세를 계산해야 했던 비참함이었다. 구약의 예언대로 유다 가계(家系)를 통해 베들레헴에서 처녀 잉태로 태어나 애굽 피난 이후 갈릴리에서 참 선지자로 전도하는 예수의 영광스런 모습이 서서히 가까워져 올수록, 차오르는 것은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던 나약한 인간의 수치심뿐이었다.

다가선 예수가 마태에게 건네신 말은 부자 청년에게 주신 까다로움도 아닌, 그렇다고 살가운 정담(情談)도 아닌 나를 따라오라는 짤막함이었다. 그러나 그 짤막함에는 아브라함의 자손 다윗을 왕으로 택하실 때 외모가 아닌 중심을 보시며 선포하신 ‘하나님 중심’ 사상이 구약을 이어 흐르고 있지 않았을까. 세상은 세리 마태를 향해 도둑과 창녀와 도매금으로 손가락질했으나, 인간의 생각이나 길과는 다른(사 55:8) 여호와의 긍휼은 무조건적 선택으로 마태를 지명하셨다. 사랑받을 만한 존재를 사랑함은 당연이나, 사랑받지 못할 존재를 사랑함은 감사이다. 이 일방적 칭의(稱義)의 감격이 마태, 곧 하나님의 선물 아니었던가.

그 감동의 힘은 마태로 하여금 모든 것(눅 5:28)을 버리고 예수를 따르게 하였다. 세리와 죄인이 모인 잔치에 예수께서 앉으셨고 스스로 의롭다 여긴 바리새인들이 이를 힐난할 때 예수는 다시금 마태에 대한, 그리고 하루하루 삭막한 세파 속에 흔들리는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인해 주셨다.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늦은 비처럼 임한 촉촉한 사랑으로 행복했던 마태의 이야기를 이어, 자신을 ‘그의 사랑하시는 자’로 표현했던 요한의 삶을 다음 글에서 만나보려 한다.

이재규(자유기고가)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이재규 집사 (장안중앙교회)

하나님의 나라<39>
<남자 그리고 여자에 대한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