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의 인물(3) - 그의 사랑하시는 자, 요한
왜 사람들은 술에 취해 짐승같이 구는지 모르겠다는 말에, 짐승같이 되어야만 사람이면 겪게 되는 생의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법이라 대꾸했던 영국의 문학가 사무엘 존슨(Samuel Johnson. 1709~1784)의 『라셀라스(1759)』에는 ‘행복의 골짜기’에 살고 있었으나 지루한 일상 속에 참 행복을 찾아 떠난 왕자 라셀라스 일행의 여행담이 펼쳐진다. 일견 지혜롭고 행복해 보였던 이들도 결국에는 무지와 불행 가운데 있었다는 것을, 완전하고 절대적인 진리와 행복이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줄거리의 이 소설에서 참 깨달음과 행복의 가장 큰 장애물은 결국 죽음 앞에 초라해지는 인간의 유한성(有限性)이었다.
‘도덕을 가르치는 사람들을 너무 성급히 신뢰하거나 찬미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천사처럼 설교하지만, 실제 삶에서는 인간처럼 살고 있기 마련입니다.’ 예리한 통찰력으로 라셀라스를 깨우치던 시인 이믈락의 조언 가운데 수차례 반추해 본 구절이었다. 진리의 말씀으로 온전해질 것을 강변한 요한복음 강해를 통해 배움을 얻은 모(某) 목사님께서 성 추문 물의로 곤욕을 치르던 모습에 실망한 옛 기억은 인간 중심적 교회관을 극복해가던 한 과정이었으나, 누구나 동일한 타락의 멍에를 진 인간의 삶이란 결국 하나님 중심의 특별 계시가 없다면 율법주의와 세속주의 가운데의 위선적인 가식과 비교와 자고(自高) 뿐일 것이다.
요한복음 8장의 간음한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에 대한 예수의 판결은 너희 중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답변이었다.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이르던(고전 4:5) 교회 단합을 위한 교만의 경계를 떠올리게 하는 이 말씀에, 아무도 여인을 정죄하지 못했음에도 이후 제자들은 낮아지기는커녕 (간간이 제자다운 신앙고백을 보이긴 하나) 세속적인 이해관계에 매몰되어, 십자가 희생 제물로 가시기 전 마지막 만찬에서까지 서로 누가 큰지를 다투는(눅 22:24) 한심한 분열상을 보였다. 살아계신 아버지 앞에서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면 족(足)하겠다 했던(요 14:8) 빌립의 영적 무지함이 차라리 낫다고 해야 할까.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의 나라를 썩어 없어질 지상의 왕국으로 착각한 제자들 가운데에서도 요한은 그 형 안드레와 함께 본인의 인사 청탁도 모자라 어머니까지 나서 집권 시의 한 자리를 구할(마 20:21) 정도로 야욕이 강했던 인물이었으며, 아울러 복음을 받지 않는 사마리아를 향해 하늘의 불을 내려 멸하자 건의하던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별칭의 격렬한 인물이었다. 세례요한이 예수를 가리켜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 하자마자 로마의 압제를 깨고 새 나라를 세울 메시아라 판단해 원 스승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던(요 01:37) 매몰참과 함께,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던 사랑을 받았음에도 대제사장 가야바와 의심스러운 모종의 면식(面識)이 있던(요 18:15) 기회주의의 단면을 보인 자였다.
섬기던 이의 죽음을 따라 장렬히 분사(憤死)한 예는 심심치 않게 역사의 미담으로 등장한다. 최후의 골고다에서는 그런 미담조차 없었으나 그나마 스승의 마지막을 지켜보았던 이가 요한이었다. 예수의 시신이 없어졌다는 막달라 마리아의 전언을 듣고 무덤으로 가장 먼저 달려간 그는 텅 빈 자리를 보고도 선지자가 일찍이 일렀던 메시아 부활의 예언을 믿지 못했다. 살아나심에 대한 마리아의 증언을 듣고도, 엠마오로 향하던 자들의 증언을 듣고도 허탄한 말로 여기던 요한을 비롯한 제자들의 의심과 불신은, 비록 책망은 받았을지언정(막16:14) 정죄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저희의 마음을 열어 구약을 깨닫게 하시고, 보혜사 성령을 통한 위로부터의 능력을 약속하셨다. 부활의 기적 후 여전히 이스라엘 왕국 회복의 때를 묻던(행 01:06) 아둔함에도 주께서는 복음의 증인이 되리라 격려하셨고, 약속대로 성령 충만함을 내리셔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확신하게 하셨다. 여러 기로에서 방황하던 요한의 불확실한 삶의 이유를, 학자들이 맥을 잡지 못하는 4복음서의 기록 목적을 약속의 영이자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다음처럼 풀어주신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요 20:31).
야심 찬 젊음이 바라본 예수의 의미는 야망의 도구였으나, 기나긴 파란(波瀾)을 겪은 밧모섬의 노구(老軀)가 깨달은 예수의 의미는 영원 전 태초부터 계셨던 생명의 빛이었다. 요한이 예수를 사랑한 것이 아닌 오직 예수께서 요한을 ‘끝까지’ 사랑하신 사랑의 힘, 세상 어떤 위인일지라도 두려워하는 죽음보다 더욱 강한 사랑의 힘은 모든 것을 이겨내는 삶의 추동력을, 그리고 세상이 결코 줄 수 없는 참 행복을 우리에게 가져다줄 것이다. 오직 주의 능력만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리라(고전 1:8) 선언했던 은혜와 평강 속에 행복했던 작은 자, 바울의 삶을 이어서 살피고자 한다.
이재규(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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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이재규 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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