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광야생활의 논리<40>
실제로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한 것은 지금부터 약 3500년 전의 일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생활을 시작하기 전까지 이집트에서 거의 400년 동안 종살이를 하였다. 홍해를 건너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바로 광야생활을 맞이한 것이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광야생활은 본질적인 면에서 이 땅의 모든 생활과 동일하다. 생활의 방식이나 문화는 각 시대마다 여러 가지의 차이를 지닌다. 성경은 40년의 광야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계시하였다. 이러한 점은 성도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이 40년의 광야생활을 소재로 삼아 그 속에 있는 의미나 그 논리를 검토해 보고자 한다.
1)주야의 논리
이 주야의 논리는 기본적으로 창세기 1장에 기초한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것이 주야의 논리이다. 아침이 되면 반드시 저녁이 된다. 이러한 논리를 자연이라고 보는 것은 자연주의자들의 견해이다.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낮과 밤을 만들었다고 밝히 말한다. 광야생활에서의 낮과 밤은 구름과 불이 각각 함께 한 것이다.
①낮의 구름기둥
낮은 빛 안에 있고 구름과 밀접하다. 광야에서의 낮은 밤에 비해 밝은 때이며 전진하기 쉬운 시간이다. 이것은 현상적인 설명이다. 성경의 근본적인 해석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 앞에 행하심이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백성들의 길을 인도하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백성들을 비추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진할 때에 여호와의 구름이 그들을 덮었다. 성경은 그들을 덮은 구름을 여호와의 구름이라고 강조하여 해석해 준다. 여호와의 이 구름으로 그 백성들의 행할 길을 지시했다고 밝히 해석해 주고 있다. 이러한 해석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과 원망과 우상숭배 등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낮의 구름기둥은 창조주의 존재와 그 능력과 영광을 힘 있게 대변해 주는 것이다.
②밤의 불기둥
밤은 어두움 안에 있고 불과 아주 밀접하다. 광야에서의 밤은 불이 없다면 꼼짝할 수 없는 시간이다. 성경은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유황과 불을 내려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에 기초하면 광야에서의 밤도 창조주의 손에 달려 있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주야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섭리하신 손에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광야생활의 노정에서 이집트에서 나온 지 얼마나 되었음을 날짜로 분명하게 밝혀 여러 번 확증해 주고 있다. 밤의 불기둥이 항상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했음에도 불구하고 염려와 불평을 한 긴 시간을 성경은 놓치지 않고 있다. 밤이 없으면 낮이 없고 나아가서 날이 없어진다. 성경은 여호와의 날과 구원의 날 등을 높이 세우고 있다.
2)일상생활의 논리
이 일상생활의 논리는 전도서 1장에 잘 나타나 있다. 광야생활의 일상이 주야의 연속인 것은 지금과 똑같이 해 아래서의 생활이기 때문이다. 낮과 밤이 생긴 이후에 인류의 생활과 문화는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낮이 되면 밤이 되는 것은 한 세대가 가고 또 한 세대가 오는 것과 동일하다. 이러한 일상생활의 논리는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을 병행하게 하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①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
형통한 것은 트이는 것이고 곤고한 것은 막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40년 광야의 길은 막히고 트임의 연속이다. 홍해 바다의 막힘을 성경은 결코 놓치지 않는다. 위에서 날이 낮과 밤을 통해서 생김을 강조하였다. 이렇게 낮과 밤 또한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에 논리를 붙이는 이유는 이러한 논리가 생기는 근거나 힘을 생각해 보고자 함이다. 이런 근거나 힘을 어디서 볼 수 있나? 성경 특히 잠언서나 전도서에서 말하는 지혜 없이 볼 수 있나? 이 지혜 없이 누가 깨달을 수 있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길에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었던 처지가 얼마나 많았던가? 소위 말하는 사면초가(四面楚歌)이다. 이 같은 풍전등화와 같은 광야생활에서 죽지 못하고 왜 살았던가?
②나아가지 않을 수 있나?
여기서 나아간다는 것은 살아간다는 의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걸었던 광야의 길은 삶의 길이었다. 그들의 목적지는 가나안 땅이다. 그들에게 구름과 불이 없는 길은 한 발자국도 전진할 수 없는 난관 그 자체이다. 이 상황은 신약시대의 성도가 걷고 있는 현실과 무엇이 다른가? 인간은 착각의 명수다. 어제 저녁 자고 오늘 아침 일어나 자기 발로 걸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에덴동산을 왜 만들었는가? 만들었으면 거기서 계속 살도록 하지 않는가? 여기서 인간에게 분명한 목적(目的)이 없다면 나아가는 의미나 가치는 사라질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해서 우리에게 영(靈)을 준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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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근호 목사 (중어중문학박사) 이메일 : yan825@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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