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성의 홍수 시대
‘창의성’은 일상생활 가운데 긍정적 의미로 사용되는 용어 중 하나이다. 탈근대의 시대가 지속되면서 ‘창의성’이 주는 시대적 의미는 날로 확대되고 있다. 그럼에도 창의성이 무엇인지 엄격한 정의를 내리기는 쉽지 않다. 일반적으로 창의성이란 “새로움에 이르게 하는 개인의 사고 특성”, 또는 “특정한 사고 기능이나 태도”로 ‘확산적 사고’와 유사한 개념으로 이해된다. 창의성을 교육적 차원에서 이해한 길포드(Guilford)는 창의성은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다고 전제하며 훈련을 통해 길러질 수 있다고 제창한 바 있다. 이후 길포드의 주장을 지지하는 사람이 많아짐에 따라 창의성 교육이 교육의 정상의 자리에 군림하게 되었다.
‘창의성’이라는 키워드로 검색을 하면 각종 이론과 실제, 경험담, 방법론 등 수 많은 서적이 주목을 끌만한 제목으로 어필하고 있다. 교육의 변화를 가장 잘 대변한다는 학원가 역시 너도 나도 ‘창의성’을 내세운 전단지를 주택가나 학교 주변에 뿌리고 있고, 어느 유명 학원 강사는 갑자기 창의성의 대가가 되어 명성과 부를 거머쥐었다. 뿐만 아니라 과거에 시행했던 여러 교수 방식에 ‘창의성’이라는 용어만 갖다 붙이면 제법 근사한 창의성교육이 탄생되었다. ‘동화를 통한 창의성 교육’, ‘신문을 통한 창의성 교육’, ‘융합을 통한 창의성 교육’ 등 일종의 ‘창의성 깔때기’다. 교사들 중에서도 창의성을 주제로 현장연구대회에서 입상하여 창의성 전문가로 대접받기도 하고 교사나 학부모 대상 연수 강의를 맡기도 한다.
그러나 창의성 교육의 대부분이 과거에 해왔던 방법들을 용어와 틀을 약간 흔들어 짜맞추는 것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대부분의 현장 연구도 사실 짧은 기간의 연구로 결론이 난다. 학원가 역시 창의성 바람이 불고 나서 단기간에 많은 프로그램이 만들어졌다. 그 짧은 시간의 교육으로 학생들의 창의성을 증진했다는 결론인데 가히 노벨상감이다. 교육은 ‘백년지대계’란 말이 무색할 따름이다. 그래서 필자는 창의성을 논하는 사람들이 불편하다.
주정흔 박사는 “창의성이란 가르쳐지는 것이 아니라 장기간에 걸쳐 체험되는 것이다.”라고 하여 필자의 귀를 ‘쫑긋’하게 하였다. 주장의 핵심은 체험으로서의 장(場)에 있다. 그 장은 가상의 세계일 수도 있고 현실, 즉 사람들 간의 관계일 수도 있으며 물리적 공간일 수도 있다. 그 장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상황들이 정신을 좌우한다. 말하자면 창의성이란 사제지간의 절대적 가르침과 배움이라는 선형적인 틀이라기보다는 주체들 간의 ‘소통’의 맥락을 통해, 또는 개인의 경험이나 이해 그리고 언어의 개방성에 의해 습득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가정과 학교, 사회가 바로 창의성의 장이 되는 것이다. 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교회는 남녀노소의 수직적 구조뿐만 아니라 다양한 직업과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의 성도로 결합되어 있다. 더구나 성령에 인도되어 생활하는 성도들은 자연스레 말과 행동, 사고의 깊이와 폭이 넓어지고 차원 높은 언어를 사용하게 된다. 우리 아이들이 이러한 생활모습을 경험하며 문화를 자연스럽게 체득하는 것이 곧 창의성 발달이라는 말이다. 교회는 어찌 보면 가장 훌륭한 창의성 체득의 장이 아닌가!
그러나 교회에서 소통하는 화제나 주제가 덕이 되지 못한다면 창의성의 인프라만 구축되었을 뿐 그것을 활용하지 못하는 ‘부시맨’에 다름 아니다. 제 아무리 똑똑한 현자라 하더라도 성령에 의하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의 삶은 2차원 혹은 3차원 수준에서 이해하고 생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창의성의 홍수시대에 사는 학부모로서 우리 아이의 창의성을 길러주는 진정한 방법은 아름다운 교회문화를 만들고 그 안에서 즐기며 생활하도록 도와주는 일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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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김진희(교육학박사, 이천 표교초 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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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땅<4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