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작성일 : 13-04-14 12:29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교회의 표지(標識)


교회의 표지(標識)는 어떤 교회가 바른 교회인지 구분하는 특징이나 표시를 뜻한다. 이러한 명제를 거론하는 이유는 교회가 교회로서의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본래의 역할 수행이 미비하며, 본질에서 이탈되어 외형과 의식에 치우쳐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가 세워져야 하고 특정한 건물이 있어야 교회인가? 준엄한 분위기에서 집행되는 예배의식과 성례전이 실행되어야 교회인가? 이 문제는 AD 2세기에서부터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당시 초대교회는 기독론 논쟁에 휩싸여 있었기 때문에 교회에 대한 엄격한 기준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율법주의(유대주의)나 영지주의 등의 이단이 나타남으로 바른 교회를 증명할 수 있는 외적인 특징이 필요했다. 즉 참 교회가 무엇인지, 이단이 아닌 자가 누구인지를 밝히려면 분명한 표준과 표시가 있어야 했기에 공동교회에 대한 관념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교회는 이러한 배경 속에서 점점 형식화, 제도화되어지고 전통을 소유하기 시작했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교회의 본질을 상실하고 형식과 제도, 전통에 편승해서 변질된 교회의 표상이 되었다. 칼빈은 그의 저서 기독교강요에서 “어디서든 하나님의 말씀이 순결하게 전해지고 또한 그 말씀을 들으며,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규례를 따라서 성례가 시행되면, 거기에 하나님의 교회가 존재한다는 것”이라는 교회의 표지를 제시했다. 전통적인 교회는 말씀과 성례를 교회의 표지로 규정하고 있다.
문제는 성례전의 변질에 의해 교회가 의식적인 제도에 의한 형식주의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례전(聖禮典)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예식으로써 로마 가톨릭교회는 일곱 성사(세례성사, 견진성사, 성체성사, 고해성사, 혼배성사, 병자성사, 신품성사)를 가리키고, 전통적인 교회에서는 세례와 성찬을 의미한다. 성례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예식이 수반된 전통적인 관례에 따라서 보여주는 방식이다. 즉,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성례전을 통해서 보여준다는 말이다. 문제는 제도화된 예식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는 것이냐, 아니면 성경 말씀을 통해서 그 의미를 되새기는 것이냐이다. 다시 말해 예전의식에 의한 기념인가 의미인식에 의한 기념인가의 문제라는 것이다. 중요한 점은 참된 교회의 표지에 성례전이 포함되어져야 하느냐에 있다. 이 말인즉 교회가 성례를 시행하지 않으면 ‘이단’이 되느냐는 것이다. 교황주의자들은 성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가톨릭 교인들은 성례를 구원의 필수조건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그에 반하면 이단이 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세례가 올바른 교회인지 아닌지의 관건이라면, 바울의 말처럼 “나는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고전 1:14)라는 주장은 문제의 요지가 될 것이다. 하지만 바울의 세례관은 세례를 시행하는 의식 자체의 중요성 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옛 사람은 죽고, 새 사람으로 살아난 본질적인 의미에 비중을 두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세례는 말씀 전파의 방편으로써 행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교회의 진위를 가늠하는 표지로 볼 수 없다. 성찬(聖餐)이란 용어는 성경에서 사용된 적이 없고 단지 사랑하는 지체들이 함께하는 식사 문화인 애찬(愛餐)이다. 이것 역시 제도적으로 의식화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식사할 때마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 죽음을 기억하여 생각하라는 것이다(고전 11:25~26). 다시 말하면, 물세례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것이고, 애찬(만찬)은 식사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는 것이다. 성례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통해서 기념(記念)하는 것이지, 의식을 통해서 기념하는 것이 아니다. 굳이 성례를 교회의 표지로 채택한다면, 의식을 배제한 가운데서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기념하는 것으로는 한정할 수 있다. 기독교의 전유물이며, 관행처럼 시행되어 온 성례의식은 재고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성경말씀’에는 모든 것이 함의되어 있기 때문에 굳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설명하는 수단에 불과한 성례의식을 교회의 표지로 채택할 필요가 있는지 재고해 보아야 한다.
성례가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는 의식으로서 교회의 표지가 된다면, 성례이외에도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세족식도 보여주어야 하고(요 13:15), 예수에게 향유를 뿌리는(막 14:9) 행위도 재연(再演)해야 할 것이다. 보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인식해야 하고 그것이 교회의 표지가 되어야 한다면, 구약시대와 같이 하나님의 언약을 기념하는 할례, 광야에서 구원의 증표인 구리 뱀, 요단 강 도하의 증표인 12개의 기념석,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는 각종 제사의식 등을 지금도 보여주며 시행해야 될 것이고 그래야만 참된 교회가 될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성례전을 지킴으로써 참 교회가 되려면, 믿는 자들이 나타날 때마다 세례를 베풀고, 먹을 때마다 성찬식을 시행해야 할 것이다. 물론 로마 가톨릭교회는 성찬이 미사의 순서에 편입되어 있기 때문에 예배시마다 시행하고 있다. 그렇지만 전통적인 교회에서는 바울이 금기시했던 절기를 지키면서까지 일 년에 몇 차례 정도 실시하고 있는 실정이다.
예수께서 당부하신 세례와 성찬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잊지 말고 기억함으로써 범사 하나님을 인정하며 살 것을 촉구한 것이지, 성례의식 자체를 중시한 것은 아니다. 설령 의식을 행해야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교회의 진위를 가늠하는 표준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성례가 인간의 구원과 무관한 의식이라면, 굳이 성례전을 실시하지 않는다고 해서 거짓 교회로 단정하거나 이단으로 정죄해서는 안 될 것이다. 바울은 도리어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갈 4:9~11)라는 말로서 제도와 의식과 전통 등의 관습에서 탈피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걸 2:6). 히브리서 기자 역시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히 9:10)라고 증거하고 있다.
교회의 표지는 오직 ‘성경말씀’ 뿐이다. 말씀 안에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이 함의되어 있기 때문에 진리의 말씀만 바르게 분변하고 가르치고 전파한다면 참 교회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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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지서의 상관성 분석<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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