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상무, 빵 회장’에 대한 마이너리티 리포트
사람은 평등하게 대우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우리의 마음은 그 생각과 동일하게 작동하지 않는다. ‘나’라는 존재 밖의 사회가 내 마음에 영향을 주고 그 영향에 따라 틀지어진 내 마음이 나의 행동에 영향을 준다.”(EBS ‘인간의 두 얼굴’ 중에서).
미국행 비즈니스 석에서 먹을거리로 추태를 부리다가 도착하자마자 추방당한 포스코 에너지 ‘라면 상무’건이나 호텔 주차장에서 주차 문제로 직원에게 폭력을 휘두른 프라임베이커리 ‘빵 회장’을 향한 대중들의 분노가 솟구친다. 분노는 신상털기로, SNS를 통한 공분으로, 혹은 패러디로 분출된다. 집단으로 몰려가 린치를 가하는 행태가 싫은 필자는 기꺼이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쓰련다. 추태와 폭력의 행태에 동의해서도 아니요 애틋함도 아니다. 다만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오랜 세월동안 사회에 녹아 있는 문화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그들을 역지사지한 결과다.
‘라면 상무’와 ‘빵 회장’은 자기 분야에서 누구보다 열심을 냈고 수많은 실패와 자존심의 상처 속에서 오늘에 이르렀을 것이다. 성공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갈증은 당해왔던 시절에 대한 보상 심리로 나타난다. 이제는 누려야 할 때인 것이다. 그런데 시대가 변했다. 특히 젊은이에게 권위 의식은 비웃음의 대상이 되었다. 문제는 그 사실을 나이든 본인만 모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대기업 이사로서나 기업의 회장은 조직 내에서나 관계적으로 연결된 상태에서 언제나 갑의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울타리를 벗어날 때마다 다른 시각을 가진 사람들과 불화를 겪을 수밖에 없다.
성경은 부를 소유하고 있을 때 배가 불러 거만하고, 하나님을 등지는 것은 인간의 속성임을 보여주고 있다(잠 30: 8~9). 하여 조직의 우두머리가 바라보는 인간은 ‘타자’다. ‘타자’는 온전한 사람으로 인정될 수 없으며 또 원래 온전한 사람으로 인정되지도 않는다. ‘사람’의 범주에 들지 못하는 이 타자들은 단순한 타자, 즉 인간 이하의 존재일 뿐이다. 여자는 여자, 어린이는 어린이, 학생은 학생일 뿐 사람은 아니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 회장이 직원들을 머슴이라 지칭한 것을 생각해보라. 가진 자들은 이들의 인권을 침해하면서도 피해자를 본래적 의미의 인간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자신들이 인권을 침해하고 있다고 자각하지 못한다. 즉, ‘라면상무’나 ‘빵회장’은 자신들의 잘못을 하등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사회적 논란거리가 된다는 것 자체가 난센스로 느껴질 뿐이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의 저자 김경일은 한국 사회를 유교 문화로 특정 짓고 유교의 본질과 달리 지배층의 논리로 곡해되어 오랜 세월 동안 이데올로기로서 작동했던 사실을 풍부한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라면상무’와 ‘빵회장’은 민주적인 원리와 인간 존엄성의 가치에 무지하지 않다. 다만 머리와 심장이 따로 노는 것은 공교육을 통해 ‘민주주의’를 배움과 동시에 현실을 지배하는 유교적 질서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행태는 이런 뒤틀림의 결과일 뿐이다.
그런 면에서 부버(Buber)는 관계성의 어려움을 단번에 해결할 수 있는 근본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신학자, 철학자, 교육학자였던 부버는 오늘날 인간관계가 상대방을 인격적 주체인 ‘너’로 보지 않고 도구적 존재나 수단적 존재 그리고 사물적 존재인 ‘그것’으로 보는 ‘나-그것’의 관계로 타락하고 있다고 경고하였다. 그는 ‘나-너’의 관계 회복을 강조했으며 실존적 위기의 해결책으로 성과 속을 이분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에서 탈피할 것을 강조하였다. 만약 추태 당사자들이 기독교인이라면 부버는 다음과 같이 말했을 것이다.
“당신이 실수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깨끗하고 순전한 마음이 그 외의 대상에게는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이오. 만약 당신이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정성을 세속에 적용하게 되면 모두가 순수하고 인격적인 관계가 될 것이라오.”
|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
성경 속의 인물 (7)-언약 성취로 맺게 하신 믿음의 행위, 아브라함 |
임직식’, 주술적인 권위의 이양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