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작성일 : 13-07-07 16:20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모든 것을 감사히 받게 하신 참된 형통의 길, 요셉


요즘 젊은 친구들은 나한테 당해 보지도 않고’라는 자못 서늘한 영화 속 멘트로 새삼 유명세를 탔던 전직 대통령의 재산 환수법 문제가 세간의 화제로 떠들썩했다. 광주의 5월만 아니었다면,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는 책 제목처럼 고(故) 김재익 경제수석에 전권을 위임한 인사에 3저 호황과 물가 안정이 세를 더한 연 10% 이상의 경제 성장이 한층 떳떳한 업적이었을 그에 대한 평가는 현저한 극과 극을 달린다. 광주의 상처가 아물기도 전인 1980년 8월 6일, 국보위 상임 위원장이던 그를 위해 서울 롯데호텔에서 기독교의 몇몇 지도급 인사들이 조찬기도회를 개최했다. 비슷한 때에 ‘단군 이래 5천 년 만에 만나는 미소’라 그를 묘사한 어느 저명한 문인의 찬시(讚詩) 못지않게 씁쓸했던 교계의 행보를 돌아보노라면, 역사의 정의와 자유를 위한 의무를 진 신학은 필요한 경우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여 사회 구조를 변혁시켜야 하며 그것이 지상 교회의 사명이라 주장한 위르겐 몰트만의 정치 신학은 상당한 호감으로 다가온다.

1964년 『희망의 신학』을 출간했던 몰트만은 하나님을 세계 안의 내재적 존재도, 세계 밖의 초월적 존재도 아닌 ‘세계 앞의’ 미래적 존재, 곧 희망의 하나님으로 이해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신 약속에 대한 희망이 곧 믿음이며, 이러한 희망은 과거와 현재의 고난을 극복하고 미래의 하나님 나라에 가까워지도록 현실을 변화시키는 힘이라 강조한 그는 계시의 본질인 약속의 성취가 기본적으로는 하나님의 힘으로 이루어지나 많은 부분은 인간의 노력 여하에 달려있다 결론짓는 신인합력의 전형을 보인다. 꿈 탓으로 구덩이에 떨어졌고 꿈 탓으로 총리의 자리에 올랐던 요셉의 꿈을 일반 신학에서는 성도의 미래를 변화시킬 위대한 동력으로 간주한다.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을 품고 주 안에서 반드시 이루어지리라는 긍정적 사고방식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만사가 부흥하리라 외치며 세계 최대의 단일 교회를 이룩한 모 교단의 목사와 몰트만이 작년 희망 목회와 희망 신학의 의기투합으로 재회했던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귀결일 것이다.

요셉이 꿈을 꾸었기에 만민의 생명을 구한 위인이 되었는가 아니면 여호와께서 요셉을 만민의 생명의 구할 위인으로 작정하셨기에 꿈으로 계시하여 주신 것인가의 차이는 인본주의 혹은 신본주의 신관(神觀)의 중요한 분기점을 이룬다. 하나님을 여호와로 확신하기까지 일백십 년의 곤고와 형통이 갈마들었던 요셉의 삶은 오직 정하신 길을 따라 그를 낮추시고 높이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 첫 번째 이유였고,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수난과 승리를 예표하는 그림자적 섭리를 계시하기 위함이 그 두 번째 이유였다. 개개인의 사람다운 삶의 구현과 이를 위한 모순된 사회 구조의 혁신이 신학의 목적이라 말하는, 나아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종말론적으로 접근해 성도 각자의 부활이 그리스도 부활의 토대라 말하는 몰트만의 견해는 심각한 주객전도(主客顚倒)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끝까지 희망의 끈을 틀어잡게 함의 주체는 몰트만의 이론처럼 인간의 결의가 아니며, 누가 해하려 한들 그 해악을 최종의 선한 결과로 이끌어 가시는 여호와의 전적 주권에 대한 매 순간의 수긍이다.

언약 백성의 삶 모든 자리를 머리털 하나하나처럼 정치(精緻)하게 다스리시는 여호와 섭리에 대한 생생한 배움을 주는 요셉의 삶을 관통하는 단어는 형통(亨通)이었다. 온갖 일이 뜻대로 됨이라는 정의에서 그 ‘뜻’을 성경의 파편적•부분적 이해로 보자면 인간의 좋은 것이라 해석될 수도 있겠으나 성경의 구조적•전체적 이해로 보자면 그 ‘뜻’은 필연 하나님의 좋아하심으로 정리된다. 형들이 마른 구덩이로 밀어 넣음도, 노예로 이집트에 팔려간 막막함도, 보디발의 아내에게 억울한 모함을 당함도, 술 맡은 관원장이 야속히 기억을 지워버림도 그 모든 것이 창세 전 전능자의 기쁘신 뜻에 따른 선한 형통임을 아는 지혜를 배워가게 하신 축복의 사람이 곧 요셉이었다.

영국군에 사로잡힌 포로수용소에서 독일 병사 몰트만은 인간 의지에 기반한 인본의 희망 신학을 키워갔으나, 무고히 투옥된 히브리 종 요셉은 옥중(獄中)의 형통에도 감사하는 신본의 희망 신학을 키워나갔다.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음(딤전 4:4)을 철저하게 체득했던 요셉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신 우리를 용서하심처럼, 못난 형들을 따뜻이 끌어안고 관용의 눈물을 진실되이 흘릴 줄 알았던 진정한 의미의 강자였다. 하나님 5대 속성 가운데 마지막 결론처럼 가르치신 아가서의 자비하심, 자녀들의 순종케 하신 모습도 불순종케 하신 모습도 모두가 합력하여 당신의 깊은 사랑을 깨닫게 하시는 계시 도구임을 다시 떠올린다. 
서로의 흠결이 설령 드러날지라도 그 사랑의 마음을 가슴에 품고, 유력자는 어린 자를 너그러이 사랑하며 어린 자는 유력자를 정성으로 존경하는 가족처럼 아름다운 교회의 풍경으로 체제 개혁을 이루어 가시길 손 모아 소망해 본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이재규 집사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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