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오래 전에 타계한 불교계의 거장이 한 말이다. 도에 관심이 많은 어떤 사람이 위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봤다. 특별하지 않고 지극히 당연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이후 산중에서 도를 닦다보니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이 흘렀다. 몸은 늙고 병들었으나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죽기 전, 그는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득도하기 전에 이해했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와 후자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는 같은 말이되 질적으로는 큰 차이가 있다. 뜬금없이 이 말을 꺼낸 이유는 ‘배려’라는 최근의 트렌드를 되새겨보기 위함이다. 현대사회의 특징 중 하나는 각박함이다. 각박함은 사람들 간의 정이 사라진 건조한 사회를 말하며 영혼의 안식을 찾지 못한 대중들의 가련한 실체다. 사회의 축소판으로서 학교는 이러한 현실을 대변한다. 사제지간의 정은 사라지고 있으며 교사간의 교류는 공적인 부분에 한정되며 각각 파편화되어 있다. 아이들 간 다툼도 잦고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경찰에 신고하는 경우가 많다. 오죽하면 불필요한 신고로 인해 경찰력이 낭비된다고 경찰이 초등학교까지 찾아와 하소연하겠는가. 간혹 아이들 싸움이 어른들 싸움으로 변질되는 경우도 많다. 대개 ‘나’를 중심한 세계관으로 무장되어 상호 충돌이 빈번하다. 자신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상대의 잘못을 낱낱이 헤집는다. 상대 또한 원인과 결과를 들이대며 ‘네 탓이오’를 연발한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에 교육이 자유로울 수 없다. 비교적 짧은 기간에 이룬 물질적 풍요는 교육열에 기인한 바가 크고, 내용적으로는 서양 학문의 특징인 합리성의 가치를 개개인에게 주입하므로 인적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음에도 말이다. 일반적으로 합리성은 정의(正義)와 관계가 깊다. 정의적 시각은 옳고 그름을 따진다. 무엇이 합리적인지를 논한다는 것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따지는 것이다. 고로, 합리성과 정의는 사촌지간이다. 정의관을 체계화하였던 칸트(Kant)는 ‘선의지’라는 개념을 꺼내어 자신의 철학을 설명하는데 선의지는 칸트의 철학에서 가장 핵심적인 개념으로 옳은 것을 오직 옳다는 이유만으로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로 보았다. 이러한 시각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학생, 학부모 등은 주변의 갈등 상황에서 자신의 정의를 증명하기 위해 각종 인터넷 사이트나 SNS에 흔적을 남기려는데 과감하다. 따라서 오늘날의 각박함은 정의가 보편적 의미를 가지는 현실의 반영이며 교육적 기능의 아이러니다. 정의관에서는 인간을 단순화하되 심적인 상황을 감안하지 않는다. 옛날에 비해 오늘날의 사람들은 복잡한 환경만큼이나 다양한 긴장과 우울증 등 각종 심리적 문제로 피폐해 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옳고 그름의 잣대로 판단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말처럼 공허한 소리가 또 있겠는가.
‘배려’가 출현한 것은 이런 연유다. 배려는 합리성과 거리가 멀지만 그것을 통해 사회의 각박함을 극복할 수 있다는 인식을 준다. 배려는 사람간의 관계성을 중시하여 의사소통, 존중, 공감, 헌신 등의 정의적(情意的) 시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단순하지 않고 각자에게는 다양한 사정이 있으며 옳고 그름 이상의 영적인 존재라는 전제가 깔려있음은 물론이다. 부버(Buber)가 칸트의 주장과 개념이 오늘날의 교육에는 별 쓸모가 없다고 혹평한 것은 이러한 시각의 반영이다. 교육의 내용으로서의 배려를 끄집어내는 것은 각박함으로 인한 소외를 극복하는 출발점으로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배려의 이해와 실천이 ‘선의지’에 그친다면 득도 이전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를 이해한 것에 불과하다. 우리가 받아들이려는 배려는 개개인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태생하는 결과가 되어야 한다. 똑같은 말이라도 질적으로 차이가 있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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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논리, 교육논리 |
여호와 은혜 아래 거둔 죽음의 승리, 삼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