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경쟁이 싫다
다수가 동의하는 것처럼 비교적 단기간에 물질적 성취를 끌어낸 것은 교육열에 기인한 바가 크다. 그래서 나타나는 것이 교육예찬론이다. 즉, 한국의 성장발전은 교육에 빚져 있고 앞으로의 성패도 교육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학계에서는 예비 교사나 현직 교사들을 대상으로 외국의 창의적인 교육방법을 소개하고 있고(논문, 저서 등), 교사들은 그런 방법을 적용하여 얼마나 효과적인 결과가 산출되는지를 수업으로 보여주려 하며(수업실기대회), 당국에서는 그것을 척도삼아 개개 교사의 점수를 매겨 승진가산점을 부여하고 나아가 학생과 학부모까지 참여시켜 교사로서의 됨됨이를 재단하고 있다(교원능력개발평가제).
이상의 교육열은 ‘경쟁’의 다른 이름이며 경쟁은 곧 ‘줄세우기’다. 설령, 모든 분야에서 평가가 시행되고 있고 교육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당위성을 받아들인다 해도 “나는 경쟁이 싫다.” 긍정적으로 답하기 곤란한 실체가 있기 때문이다. 외국의 창의적인 교육방법이라는 것은 그 나라에서 통용될 수 있는 고유의 문화적 배경을 필요로 하지만 문자 형식만 받아들여 보기 좋게 포장되어 소개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러나 문화적 괴리는 피할 수 없다. 때문에 다수의 학자들은 이론으로 치우치지 않았으며 우리에게 적용이 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이론과 실제’라는 타이틀을 즐겨 단다. 그럼에도 책의 내용 중 상당수는 이론이고 실제라는 것도 ‘실제적 이론’인 경우가 많다. 실제란 물 건너왔든 토종이든 많은 임상실험을 거쳐 다듬어진 실제여야 한다. 수업실기대회는 어떤가. 한두 번의 공개수업을 위해 담보되어야 할 시간이 너무 많다. 즉, 한 가지 특별한 방법을 적용하기 위해서는 학생들의 숙달이 필요하고 그 숙달은 창의와는 거리가 먼 반복훈련을 필요로 한다. 수십 쪽의 공개 수업안을 만들기 위해서는 밤잠을 설쳐야 하며 거의 1년간을 이 대회에 매달려야 한다. 상당한 분량의 보고서를 써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교실환경을 멋지게 꾸며 잠재적 평가요소를 추가해야 한다.
교사가 바쁘면 학생들에게 진심어린 시선을 보내기 어렵다. 하지만 여유를 ‘게으름’이나 ‘무노동’과 등치시켜 비판하는 시대다. 모든 교사가 바빠야 제대로 된 실적이 산출되는 줄 안다. 그래서 교원능력개발평가제(이하 평가제)다.
교육부에서 제시하고 있는 평가제의 목적은 두 가지다. 하나는 ‘교원의 교육활동에 대한 전문성을 진단하고 그 결과에 따른 능력개발을 지원하여 학교교육의 질 향상을 도모’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학생들에게 양질의 교육을 제공하여 학교교육 만족도를 향상하고 구성원간의 소통증진을 통해 공교육의 신뢰제고’를 위한 것이다. 의역하면 교사에게 ‘여유는 사치며 무조건 바빠야 한다’는 것이다. 목적도 추상적이지만 실제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그 결과 활용은 꽤 구체적이며 구속력이 있는 점이다. 그간 평가제는 판단기준의 불명확성에 많은 의문이 있었다. 동료 교사를 평가할 때의 기준인 그 사람의 전문성, 교양, 품위, 공직으로서의 사명감 등을 내가 어찌 알겠는가. 그것을 1등부터 꼴찌까지 서열을 매겨야 하니 모두가 피곤하다. 애매함과 주관성으로 말미암은 결과 교사들 간의 갈등이 돌출되기도 한다. 학부모의 고충도 다르지 않다. 일회성 참관수업 후 담임을 평가하라는 것도 애매하지만 다수의 학부모가 일회성 수업조차 참관하지 못한 상태에서 평가를 강제하는 제도는 분명 심각한 문제다. 결과적으로 전문적 능력 향상의 기회가 아닌 측정을 위한 측정 등으로 애초 취지와는 다른 결과가 나타난다.
교육은 경쟁이 아닌 협동에 있다. 다른 사람을 짓누르고 올라서야만 추앙받는 동물의 세계를 모방해선 안된다. 때문에 협동학습 위주의 수업이어야 하고 시험을 위한 교육이 아니라 교육을 위한 시험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사에게 여유와 자율성이 주어져야한다. 지금과 같이 학생이나 교사들을 경쟁으로 밀어넣고 교육열로 포장하며 자화자찬하는 것은 난센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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