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작성일 : 11-03-28 14:14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16, 성령-구약성경에 없나?


구약성경에는 성령이라는 말이 1회도 나오지 않는다. 성령이라는 말이 없다고 해서 성령을 의미하는 말씀이 없을까? 이 점에 대해서 쉽게 그렇다고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제기하면 대부분 전통적인 삼위일체(三位一體) 교리를 연상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구약성경에 성령이 계시되었나? 이 주제는 전통적인  삼위일체 교리를 성경적으로 고찰하고 연구하여 정리할 수 있는 중요한 내용의 하나이다.

1)창세기부터 나오는 성령
 
 창세기 1장 1절부터 근본적으로 성령을 의미하는 하나님이 나온다. 구약성경 39권에 성령으로 가득 차 있다. 여기서는 논리적인 비약에 유의하여 창세기 1장 2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출발한다. 또 사도행전에서 인용하고 있는 요엘서를 중심으로 논리의 구성에 주안점을 두고자 한다.

①수면 위에 운행하시는 영(靈)

 창세기 1장 2절에서 수면 위에 운행하신다는 의미는 전부를 지배하심이다.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면서 모든 것을 다 듣고 보신다. 여기서 하나님의 영을 해석할 때 성령이 아니라고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신다는 것은 결국 성령이 임한다는 의미이며 성령이 충만하다와 같은 의미다. 마태복음 14장에는 마치 유령에 관한 이야기 같은 사실이 있다. 그것은 예수께서 바다 위를 걸어가신 일이다. 바다 위를 걸어 갈 수 있는 것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성령을 힘입고 있기 때문이다. 천지를 창조하신 분은 스스로 존재하는 분(출3:14)임을 증거한다. 이렇게 스스로 존재하는 분임을 증명하는 성경의 원리가 언약하여 성취하는 것이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기록하게 하시어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임을 증명하신 것이다.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은 수면 위에 운행하신다는 말씀으로 계시하신 것이다. 수면 위에 운행하시는 영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의 영이며 하나님 여호와의 영이다. 구약성경의 요엘서에서 여호와의 영을 만민에게 부어주고 정한 때가 되면 그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을 예언한 바(욜2:28~29) 있다.     
 
②요엘서에서 예언한 그 영

 요엘서에서 예언된 여호와의 영은 창세기에서의 수면 위에 운행하시는 영으로부터 말라기서까지 연결해주고 있다. 수면 위에 운행하시는 그 영은 모세나 백성에게 임하여(충만하여) 일을 하게 할 수 있는 근거이다(출31:1~5). 이렇게 임한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모세와 말하고 통한다. 또 모세에게 임한 그 영을 모세와 함께 한 칠십 장로에게 임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는 근본이다. 여호와께서 강림한다(내려간다)는 본질이 여호와의 영이 임한다는 의미다. 구약성경의 모든 내용은 메시야 오실 것의 예표이며 징조이다. 다니엘서의 그 모든 예언도 하나님 나라이신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실  것에 대한 예표이며 징조이다. 이런 차원에서 요엘서에서 정한 시기( 그 날)에 여호와의 영을 부어 준다는 이 부분의 초점도 언약된 그리스도가 오는 것에 맞추어져 있다. 그리스도가 오시는 것에는 반드시 성령으로 잉태되고 성령을 힘입어 그 모든 일들을 하시는 내용이 들어 있다. 그리스도가 오시고 부활 승천하시고 약속된 성령이 정한 시간과 공간과 인간에게 임한 것은 메시야가 오시는 진리 중심으로 모두 포괄되어 연결되어 있다.

2)말라기서에 나오는 성령

말라기서에는 구약성경을 정리하고 신약성경을 이어가는 중요한 맥락의 내용이 있다. 이 말라기서는 비교적 짧은 범위인 12소선지서를 묶어 마무리하고 있다. 조금 더 넓은 범위인 이사야서부터 시작된 선지서 전체를 묶어 연결하고 있다. 여기서는 특별히 이 주제와 연결하여 말라기서 마지막 장 마지막 절에 나오는 내가 와서라는 말씀을 강조하여 관심을 가져 본다.

①내가 와서라고 할 때의 내(여호와)

구약성경의 마지막에 예언된 내가 와서 이 땅을 친다고 할 때의 내가는 여호와이시다. 여기서 그 땅을 치지 않도록 이라는 내용으로 번역되어야 한다고 한다. 여기서는 친다와 치지 않는다는 문제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기로 한다. 그것은 내가 와서라는 말씀 즉 내가 온다는 의미에 집중하기 위해서이다. 말라기서에 나오는 내와 나 그리고 주는 모두 여호와이시다. 그 여호와는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만군의 여호와(萬軍之耶和華)이시다 내가 와서라는 의미는 내가 임한다는 뜻과 같다. 내가 임한다는 것의 본질은 하나님의 영이 임하는 것이며 결국 성령이 지배하고 임하는 것이다. 구약성경이 여호와의 언약이 됨을 구약성경 마지막의 내가 와서라는 이 결어가 증명을 해주고 있는 셈이다. 내가 와서라는 계시의 말씀이 구약성경이 여호와의 언약이라는 전체 내용에 못 박아 주는 역할(전12:11)까지 하는 셈이다. 말라기서에서의 나(내;주)는 만군의 여호와로 강조되었다. 그 여호와는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며 이스라엘 백성을  400년 동안 애급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분이다. 이러한 내용은 예수가 성령으로 잉태된 내용에 긴밀히 연계된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 이름이 임마누엘이라 한 것과도 밀접하게 연계된다. 앞에서 요엘서의 예언이 성취된 것을 사도행전(2:16~21)에서 증명하고 있는 진리에 재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②스스로를 임하게 할 그 영

내가 와서라고 할 때에 내가라는 주어(主語)는 창세기부터 말라기서까지를 말씀하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키며 의미한다. 그 분 여호와의 영은 본질적으로 성령이시다. 성령이 임(臨)하다와 성령이 충만하게 된다는 것은 상통하는 말씀이다. 성령을 힘입는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은 스스로 운행하시고 운동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서 운동력이 있다고 할 때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영과 본질적으로 같은 셈이다. 스스로를 임하게 한다는 것은 자기 스스로가 임한다는 의미와 동일하다. 여호와께서 강림한다(민11:17, 말3:1~5 등)거나 성령이 임한다고 할 때 임(臨)한다는 본질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보통 단순하게 육체나 물체의 이동으로 볼 수 없을 것이다. 여호와나 성령께서는 물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과는 다른 문제이다. 성령께서 임한다는 것은 자기의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을 기억하여 돌아보며 지키는 것이다. 그것은 임마누엘이라는 의미와 아주 밀접하여 근본적으로 자기 스스로와 함께하는 것이다. 세상 끝날까지 성도와 항상 함께 하신다는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시다. 성령은  교회와 영원히 함께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영이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근호 목사 (중어중문학박사)
이메일 : yan82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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