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정치적 문제점과 대안<2>
한국교회 정치 문제점의 근본적인 원인은 진리이해의 결핍 혹은 왜곡현상이다
더 온전한 신학의 패러다임이 나오면 교회 정치체제도 새롭게 바뀌게 될 것이다
(2) 한국교회정치 부패의 근본적 원인
이상과 같이 분석되는 한국교회 정치의 문제점은 도대체 어디로부터 기인하는 것일까? 그 원인은 여러 각도에서 분석되고 진단 될 수가 있을 것이다. 즉 지도자의 부패, 혹은 성도들의 무지와 맹목적 추종, 혹은 교회 제도적 문제점 등등..... 그러나 이런 점들은 현상적인 원인이 될수 있으나 근본적인 원인은 아니다.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원인의 규명과 진단이 없이 피상적으로 진단하고 대처하는 것은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는 원인이 된다.
단마디로 말해 교회 정치상의 문제의 근원적인 이유는 정치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부패했던 중세 교황정치의 문제점이 그들의 그릇된 신학적 오류에서 기인했듯이 한국교회정치의 문제점 역시 신학의 문제점에서 찾아야 한다. 말하자면, 한국교회에서 선포되는 진리의 문제점이다. 성경이 복음진리가 제대로 이해되고 올바르게 선포되고 있는가이다. 여기서부터 점검되지 않는 일체의 현상분석과 정치개혁을 향한 시도는 일시적이고 피상적인 접근일 수밖에 없다.
진리이해와 교회정치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전자가 후자의 뿌리이며 전제이다. 진리 이해의 깊이와 포괄성만큼 성숙하고 복음적인 정치방식과 실행이 가능할 것이다. 뿌리의 견실함이 없이 줄기의 튼튼함과 열매를 기약할수 없듯이 아무리 정치 현상 자체의 문제를 분석하고 대안을 추구해도 정치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진리이해에 문제가 있다면 근본적인 대안이 결코 될수 없다.
진리이해와 교회 정치의 긴밀한 상관성에서 본질적인 원인을 검토하기위하여 현존 장로교회 정치체제의 실상을 먼저 검토해보기로 하자. 역사상 가장 건전한 교회정치 제도는 두말할 나위없이 장로교 정치체제이다. 장로교정치체제는 한편으로는 교황의 전횡과 독단을 거부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회중중심주의 즉 지도자보다는 성도들의 의사결정을 우선시하는 체제를 바람직하게 보지 않는다. 전자는 그리스도의 통치권좌에 인간이 올라가는 종교권력화 현상이요, 후자는 진리의 깨달음의 선진이라고 볼수 있는 지도자의 지도를 거부하는 세속적 민주주의, 즉 숫자에 의한 세력화이기에 그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
이와 같은 양극단의 정치 체제를 지양하는 것이 장로교회 정치체제이다. 장로정치체제는 목사와 장로의 모임인 당회를 중심으로 한다. 이른바 집단지도체제인 것이다. 이는 지금까지 역사상 등장한 교회정치 체제로서는 가장 바람직한 성경적인 제도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정치 제도의 구축만으로는 성숙한 정치운영을 보장할 수 없다.
논리적으로 말해 장로교회 정치의 원만하고 성숙한 운영을 위해서는 당회원의 성숙, 즉 진리에 입각한 신앙인격의 성숙이 전제되어야 하고 그 성숙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진리의 올바른 이해와 깨달음이 필수불가결하다. 진리의 풍성한 깨달음 없이는 진정한 신앙인격의 성숙은 기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뿐 만아니라 성도들의 성숙 역시 필요하다. 장로교회정치는 지도자의 지도에 의해 체제를 이끌어 가되 진리 깨달음에 입각한 성도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순종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신자의 맹목적 추종을 유도하는 우민화 정책은 장로교회 정치체제와는 정반대의 대척점에 있다. 요컨대 체제의 건전성만으로는 체제운영의 성숙을 보장 할수 없다는 것이다. 체제의 건전성도 중요하지만 지도자의 올바른 진리이해와 진리 교육을 통한 성도들의 성숙이 선결과제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역사적으로 검증되고 가장 성경에 근접한다고 하는 장로정치체제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한기총 사태와 같은 부패한 정치현상을 드러나는가이다. 서로 한국교회의 장자 교단임을 주장하는 두 교단 지도자의 권력투쟁의 양상이다. 세상 정치에서도 비판 받는 불법적 금권선거와 문제를 범하고 있으며 사태의 문제점이 드러났는데도 불구하고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조금도 반성과 개혁의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
왜 그런가? 그 사람들이 특별히 더 죄인이기에 그러한가?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진리와 은혜의 도우심이 아니면 너나 할 것없이 권력추구적인 존재이다. 이를 성경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예수님께서 곧 십자가에서 죽게 될 것을 가르쳐주는 데도 제자들은 아랑곳 없이 누가 오른편과 왼편의 권좌에 앉을 것인가를 노리고 있었다. 그것이 모든 인간의 허탄한 죄성의 발로이다. 성령 강림이후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진리를 진리답게 깨닫고 난후 제자들의 삶의 가치관과 삶의 양태가 완전히 바뀌게 된 것이다.
이점에서 볼 때 한국교회 정치 문제점의 근본적인 원인은 진리이해의 결핍 혹은 왜곡현상이다. 한국교회의 강단에서 순수한 복음을 듣기가 참으로 어렵다. 이른바 말씀의 기갈 현상이다. 홍수에 마실 물이 없다는 말처럼, 강단에서 외치는 소리는 많으나 성경전체가 가르치는 체계적이고 깊이 있는 복음이 잘 들리지 않는다. 인간의 도덕주의적 행위 독려, 감성을 자극하는 감상주의적 접근, 예수이름으로 세속적인 복을 빌어주는 기복주의적 설교, 세속적 성공이 축복받은 삶으로 호도하는 변질된 복음이 어지럽게 난무한다. 이런 빗나간 설교들은 성경 이해의 빈곤 혹은 왜곡으로부터 말미암는다.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과 위대한 주권, 그리고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이 선포되지 않는다. 문제는 이로부터 기인한다. 한국교회 정치의 문제점은 여기로부터 진단되고 점검되어야 한다.
3) 대안---왜 진리의 정치이어야 하는가?
대안은 무엇인가? 그것은 “진리의 정치”이다. 위에서 강조한 대로 진리이해와 정치 현상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진리이해의 수준 만큼 정치행위가 나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치 현상을 문제시하되 그 정치 현상의 뿌리가 되는 진리이해의 문제점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1)구속사적 전통 신학의 한계를 넘어서
한국교회의 신학적 뿌리로부터 이 문제가 점검되어야 하는 것이다. 한기총 사태가 이렇게 심각한 문제를 드러내고 진행되고 있다면 응당 신학자들은 신학적 진단을 하고 발언해야 할 것이다. 기껏해서 기독교시민운동의 한 지도자가 이 문제사태에 대해 도덕적 차원에서 발언하는 것으로 진정한 문제의 해결일수 있는가? 목하 진행되고 있는 한기총 해체운동이 점차 탄력을 받고 있는 듯 하다. 그러나 그것은 현상적 대증요법이지 근원적 진단과 처방이 아니다. 현존의 부패한 체제가 해체되면 또 다른 정치 부패가 터져 나올 것이다. 뿌리가 썩어 있는데 가지치기를 해서 나무의 건강성을 보장 할수없는 이치가 아닌가.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뿌리는 이른바 구속사 신학이다. 구속사 신학은 16세기 루터와 칼빈의 신학적 작업의 귀결로서 오백년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이제 그 신학이 지니는 진리성과 세계관의 의미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시점에 온 것이다. 구속사 신학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이 인간의 구속을 위하시고 구속 받은 성도는 율법을 규범으로 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야한다는 것이다. 세계관적 틀은 “창조-타락-구속”이다.
이제 이런 수준의 신학적 이해와 세계관적인 틀을 가지고서는 건강한 교회와 교회 정치를 기약할수 없다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신학 패러다임의 변화가 근본적으로 요청되고 있다. 성경이 가르치는 복음진리는 구속의 복음을 훨씬 넘어선다. 성경이 가르치는 복음은 역사적 차원에서의 인간의 구속이전에 하나님의 존재의 문제이며 하나님의 영원한 뜻에 관한 문제이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이요, 그분이 이 세상을 향한 영원한 뜻을 가지고 계시고 그 뜻대로 시행하시는 여호와 이심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영원한 뜻의 시행 방식이 그리스도를 통한 언약과 성취의 방식인 것이다. 인간의 구속은 그 영원한 언약 성취경륜의 실행과정에 포함된 내용이며 계시 방편일 뿐 이다. 성경의 복음 진리는 결코 인간의 구속으로 축소될 수 없다.
이런 성경의 본질적 복음 이해에 기초하는 세계관은 이른바 구속사적 세계관의 틀을 훨씬 넘어선다. 즉 창조-타락-구속이라는 구속사적 틀은 인간의 구속을 목적으로 한다.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언약-성취-계시완성”이라는 틀이 성경이 가르치는 근원적인 세계관적인 틀이다. 그 안에 창조, 타락, 구속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상에서 간략하게 설명한 것이 이것이 이른바 언약성취사적 성경신학의 관점이다. 이 관점에서 말하면 성경이 가르치는 복음이란 하나님의 영원한 살아계심의 증거요, 그분의 가지고 계시는 속성을 밝히는 것이다. 이런 설명의 체계안에서 보면 인간의 구속은 성경진리의 근본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영원한 하나님의 영광선포라는 궁극적인 목적을 이루어가는 하나의 과정적 섭리 내용이다. 즉 하나님의 언약성취의 경륜의 시행에서 따라나오는 귀결이다.
인간의 구속 뿐 만 아니라 구속 받은 성도들의 모임에서 발생하는 교회의 정치 역시 하나님의 통치의 실현 방식에 불과하다. 이점이 전통적 장로교회체제에서 정당하고도 심도있게 논의되지 않았다. 단지 16세기 부패한 카톨릭 교회의 교황 정치를 부정하는 대항명제적 차원에서 교회 정치체제가 다듬어져 온 것이다. 말하자면 성경의 총체적인 복음을 온전하게 반영하지 못하는 구속사 신학에 기초하는 전통적 장로교회정치체제도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더 온전한 신학의 패러다임이 나오면 교회 정치체제도 새롭게 바뀌게 될 것이다.
(2) 언약 성취사적 성경신학의 관점에서본 교회정치 원리
언약성취사적 성경신학의 관점에 의하면 지상의 실제 교회정치에서 인간이 결단코 주도자가 될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의 확증과 은혜의 실현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성령께서 주관자가 되셔서 지도자를 포함하는 모든 교회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아래 복종하게 하시는 것이다. 모름지기 교회의 지도자라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의 뜻에 더욱 민감하고 더 복종하는 존재이어야 한다. 말하자면 교회정치의 절대적인 주관자가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이심을 참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강단은 영원한 뜻을 실현하시는 위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행사를 전해야 하고 실제 교회정치 운영에서도 그분의 주권적 통치를 인정해 가는 일이다. 그리스도가 머리되어서 통치하신 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분은 하나님과 동등된 분이셨지만 그 자리를 비우시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성도들을 섬겨주신 것이다. 그런 그리스도를 하나님은 부활케 하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게 하신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통치 방식과 은혜를 계시하시는 방편이자 길이었다.
교회정치의 수행자인 교회의 지도자는 이런 그리스도의 섬김과 복종의 마음을 먼저 배워가는 사람이다. 직분이 지도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진리의 힘, 그리고 진리에 사로잡힌바 된 마음이 교회 지도자를 지도자 되게 한다. 이점이 세상의 지도자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진리의 마음, 즉 그리스도의 마음을 배워가는 지도자가 먼저 하나님을 범사에 인정하는 본을 보이며 교회 정치를 수행할 때 이른바 섬김의 정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외에 다른 길은 없다. 이것이 진리되신 그리스도가 머리 되셔서 행하시는 교회 정치 방식이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영으로 오신 성령의 주권적인 인도에 의한 일이다. 진정한 진리의 깨달음 없이 죄인이었던 인간은 결코 부패한 권력추구적 정치 행위를 스스로 벗어 날 수 없다.
여기서 명확하게 구분해야 하는 것이 있다. 도덕적 차원의 인간중심적 섬김과 하나님 영광을 목적으로 하는 진정한 섬김이다. 전자는 타락한 인간의 자기 의의 실현이며, 후자가 성령의 인도에 의한 섬김이다. 즉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을 목적으로하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가기 위한 진정한 섬김의 정치는 오직 약속대로 오신 성령의 사역이다. 달리 말하자면 정당하고도 성숙한 교회정치는 올바른 신학의 구체적인 열매이다. 신학과 정치는 분리될 수 없다.
의와 평강과 희락이 넘치는 하나님 나라는 진리말씀의 인도를 받는 성숙한 섬김의 교회정치 방식을 통해 이 땅위에 구현된다. 이를 성경은 “진리의 정치”라고 한다.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빌레몬서에 이르는 체제무장의 복음은 이런 진리의 정치와 행정의 원리를 소상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바울은 어린 디모데에게 진리를 진실하게 배워가는 자가 교회정치 리더가 되는 이른바 “교육적 정치체제”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교회 일군을 세우는 방법과 조직의 원리를 가르치되 결국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고난을 각오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에 착념하라“ 이것이 핵심이며 교회정치의 뿌리임을 가르치고 있다.
교회정치의 꽃으로 불리우는 마지막 빌레몬서는 진리에 입각한 성숙한 교회 정치 지도자인 바울의 정치 원리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즉 마땅한 일이지만 명령하지 않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부탁하고 요청하는 정치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 또한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도록 지도하고 있다. 더 나아가서 불의한 것을 대신 자신이 감당하면서 문제 많았던 오네시모를 수용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도 성숙한 정치행위인가! 이는 인간 바울의 정치가 아니다. 바울을 붙들고 있는 진리의 영, 성령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이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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