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한국교회 선교의 문제점과 대안<1>
1. 서론---선교의 근본적 의미에 대한 신학적 성찰
한국교회의 문제점을 분석함에 있어서 마지막으로 검토해야 할 점은 선교의 측면이다. 선교란 도대체 무엇인가? 교회의 정체성과 의미를 생각함에 있어서 선교의 의미는 더 말할 나위가 없이 중요하다. 선교란 하나님의 거룩한 복음을 땅끝까지 전파하는 교회의 본질적인 존재이유에 해당한다. 그만큼 선교는 교회의 생명에 속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도 중요한 선교의 의미가 한국교회 안에서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본질적으로 이해되고 그렇게 시행되고 있는가? 지난 수십년간 한국교회는 외형적으로 볼 때 뜨거운 선교의 열정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많은 자원이 동원되며 지금도 열정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런 현상에는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을 것이며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가 있음이 분명하다. 백이십 여년전 미전도 종족중의 하나였던 한국이 해외로부터 선교를 받아 복음이 이 땅에 전파되고 교회가 세워진 이후 그 은혜의 복음을 다시 다른 나라로 전파하게 된 것이다. 이 얼마나 놀랍고도 감사한 일인가!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제 현 시점에서 선교의 본질적인 의미를 새롭게 검토할 시점에 와 있다.
선교는 참으로 온 역사를 주권적으로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며 그 만큼 거룩한 하나님의 사역이다. 따라서 그 일은 하나님의 원칙과 방법을 따라 수행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만약 선교를 수행함에 있어서 인간의 인위적인 전략과 욕망이 개제되어 있다면 그 만큼 문제점을 야기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하시고자 하신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명령 하나만으로도 이 세상의 모든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구원시킬 수 있다. 하나님께서 못하셔서 안하시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연약한 성도들을 불러 변화시키시고 선교의 도구로 사용하셔서 거룩한 복음을 전파하게 하시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들을 깊이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즉 선교의 과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더욱 깊이 배우고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그 때라야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체득적으로 깨달아 누리게 된다. 자식을 낳아 사랑해봐야 길러주신 부모의 사랑을 더욱 깊게 느낄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런 본질적인 의미를 선교가 담고 있기에 선교는 참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의미를 가지고 실행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그러나 과연 현존 한국교회 선교의 현장에서 위에서 언급한대로 소중한 의미를 가진 선교가 이루어지고 있는가?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의 진정한 선교의 의미가 실현되고 있는가? 이에 대해 긍정적으로 답하기기 어려워 보인다. 단마디로 말해 선교의 의미는 그 선교를 수행하고자 하는 교회의 성숙도와 정비례한다. 또한 교회의 성숙도는 복음이해의 깊이에 달려있는 것이다. 과연 한국교회의 선교는 건전하고도 올바른 신학에 기초한 성숙한 선교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인가?
여러 수준에서 현존 한국교회 선교의 문제점을 거론 할 수 있다. 즉 구체적인 선교정책의 부재로 인한 장기적 선교 전망의 결여, 선교사 훈련의 미비로 인한 선교사 자질의 문제점, 선교 파트너쉽의 결여로 말미암는 개교회의 경쟁적 선교의 수행 등을 들 수가 있다.
선교에 대해 의식 있는 성도들은 이미 이런 문제들은 의식하고 있고, 진지한 선교 단체들 가운데에서도 극복을 위한 몸부림도 있어 보인다. 그러나 이 글에서 지적하고자 하는 점은 위에서 거론한 문제를 넘어선다. 즉 선교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 대한 신학적 성찰이다. 선교의 본질적 의미는 무엇이며 무엇을 전하는 것이 진정한 선교인가 하는 것이다.
2. 문제점
1) 선교의 도구화
첫 번째 지적되는 문제점은 선교가 도구화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선교 의미의 타락이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선교의 주체는 결코 인간이 될수 없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선포하는 선교 사역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근거한다. 만물을 작정하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하나님의 자녀들을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해 놓으셨고 그 백성들을 구체적인 역사가운데 찾으신다. 이런 주권적인 하나님의 뜻을 전제하지 않는 선교는 필연적으로 인간중심적인 사업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이점에 비추어 볼때 현존하는 한국교회 선교는 근본적인 성찰을 요한다. 왜냐하면 선교의 의미가 지극히 목회중심적인 차원에서 도구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개교회의 교회성장의 일환으로 선교가 수행됨으로 도구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선교의 본질에 대한 왜곡이며 변질이다. 선교가 하나님의 거룩한 뜻의 실현이 아니라 인간의 계획과 야심의 실현도구가 된 것이다. 도무지 선교가 인간 목회자의 야심의 실현 혹은 목회성과를 챙기기 위한 일환이 될 수 있는가? 결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모름지기 선교는 하나님이 가지신 원대하고도 놀라운 계획이며 그분의 성취 사건인 아닌가! 만사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하시는 일이되 선교는 더욱 그러하다.
선교란 하나님께 절대적 주관자가 되셔서 당신의 영원한 복음을 이 땅위에 성취하시는 과정이며 영원한 생명의 전파이다. 따라서 선교는 교회의 목회자가 주체가 되어 목회적 차원의 사업으로 환원될 수 없다. 그것은 가장 전형적인 선교사였던 사도 바울의 선교적 삶과 역사를 들여다 보면 뚜렷하게 확인된다.
원래 바울은 선교의 계획이나 비전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만세전에 바울을 이방의 사도로 작정해 놓으시되 그로 하여금 바리새인의 삶으로 인도하셨다. 그래서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 일에 찬동했으며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일에 앞장섰다. 왜 그렇게 하도록 섭리하셨는가? 그것은 이방 땅을 향한 거룩한 선교가 바울의 의지나 의로움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절실하게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다. 요컨대 바울에게 있어서는 선교 사역 자체가 놀라운 은혜의 역사였다.
이 점이 선교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이를 간과한 선교는 인위적 목적을 위한 도구로 변질된다. 즉 자칫하면 인간 목회자의 목회 야심 혹은 소영웅적인 성향을 지닌 선교사의 도구적 사업이 된다. 진정한 의미의 선교는 결코 그럴 수가 없다.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을 선포하는 선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의 가치가 전파되는 선교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이다. 이는 도무지 인간이 계획하거나 주도하는 일이 될수 없다.
바울은 자신의 생각으로는 아시아로 즉 동쪽으로 가고자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그와 달랐다. 반대편인 서쪽 방향인 마게도냐 반도로 가게 하셨다. 바울은 단지 하나님이 주도하시고 수행하시는 선교의 도구였다. 그래서 그는 선교가 이루어지면 질수록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노래하는 인생이 되었다.
한국교회에서 실행되는 선교의 실행 일체를 싸잡아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선교를 향한 열정도 있으며 실제적인 사역의 결과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제 찬찬히 돌아볼 때가 되었다. 선교란 근본적으로 무엇인가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이 필요하다. 방향과 목적이 잘못되어 있는데 단지 열심히 하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선교는 결단코 인위적 목회의 도구가 될 수 없다. 선교의 가시적 성과를 내고 상위기관에 보고하는 식의 지엽말단적 행정의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선교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며 그의 영원한 계획의 성취사건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거룩하고도 영광스런 진리 전파의 선교 사역에 쓰임을 받는 종에 불과하다.
2) 선교현장에 전해질 내용의 문제
두 번째 검토되어야 하는 근본적인 문제점은 선교 현장에서 증거되는 복음의 내용이다. 선교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하시는 일이라면 선교의 내용 역시 하나님의 존재확증과 영광 그 자체를 드러내는 복음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선교 현장에서 전해지는 복음의 내용은 얼마나 충실한가? 이는 한국교회 선교의 현주소를 가르쳐 주는 본질적인 문제점이다.
선교란 단기적 행사가 아니다. 선교란 물질의 지원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선교란 하나님을 모르는 백성에게 하나님이 누구시며 그분이 참으로 살아계시는 분이라는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여기에 선교의 내용에 대한 심도깊은 신학적 성찰이 필요한 것이다. 성경적인 신학이 뒷받침되지 않는 선교는 참으로 피상적 행사가 되거나 인위적 성과에 연연하는 악순환을 벗어나지 못한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선교란 인간적 열정의 산물이 아니다. 선교는 하나님의 작정하심과 주권적인 역사의 산물이되 복음의 내용을 가지고 이루어진다. 복음의 내용의 깊이와 충실성이 전제되지 않는 선교란 알맹이 없는 행사가 될 것이다. 이 점이 한국교회 선교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의 자리이다.
진리, 교회, 선교는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다. 진리의 수호와 증거, 누림의 자리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이며 하나님 나라가 이 땅위에 임하고 있다는 확증이다. 진리의 기쁨과 누림으로 말미암는 진정한 성장은 필연적으로 진리의 전파 혹은 하나님 나라의 확산을 향한 절실함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이런 맥락에서 선교의 의미가 재규정되어야 한다.
진리에 대한 부단한 배움과 이해, 그로 말미암는 진지한 성장을 전제하지 않는 선교란 공허한 메아리일 수밖에 없다. 이점에서 한국교회의 선교의 관행은 새롭게 검토되어야 한다. 이런 주장은 지금 열심히 선교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이나 교회가 들을 때 새삼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한국교회의 계급적 관료화, 개교회주의적인 목회관행, 선교에 대한 둔감 등으로 말미암아 조직교회 밖에서 선교 단체들이 생겨났고, 나름대로 선교적인 열망과 실천들을 이루어 왔다. 그러나 이제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조직교회와 관련된 교단적 차원에서든, 선교단체적인 차원이든 간에 지금까지의 선교관행 일체에 대한 근본적 반성을 위해서는 선교사역에서 전해진 복음진리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를 물어야 한다. 그리고 그 진리에 입각하여 세우고자 하는 교회 즉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성격과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지 물어야 한다.
수많은 선교지, 선교사들이 증거하고자 하는 복음 진리는 얼마나 성경에 근거하고 있는가 그 복음에 근거하여 세우고자 하는 교회관은 얼마나 건실한가. 만약 선교현장에서 전해지는 복음의 내용이 빈곤하다면, 혹은 왜곡되어 있다면 문제는 심각하다.
선교는 하나님의 사역이며 하나님의 주권과 풍성하심을 증거하는 일이다. 이제 한국교회 선교는 새롭게 성찰되어야 한다. 성도들을 다그쳐 선교의 하수인으로 사용할 일이 아니다. 선교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진리 즉 위대한 계시진리를 배워 감동하고 그 진리안에 풍성함을 누리는 영혼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다.
진리가 진리대로 확증되고 증거되면 누구나 선교의 일꾼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선교는 특정 선교사들의 선택사항이 아니다. 택한 백성이라면 누구나 복음의 증인이요 선교사인셈이다. 참으로 복음을 누리며 살아가는 영혼은 누구나 선교적 인생이 될 것이다. 문제는 선교활동 자체가 아니라 선교활동에서 증거하는 내용이 참으로 성경적인 복음인가 하는 것이며 또한 그렇게 자신의 삶속에서 누리고 살아가고 있느냐이다.
내용이 부실한 선교, 그것은 부실공사에 해당한다. 홍수가 나도 무너지지않는 건실한 복음공사는 복음내용의 확고함과 견실함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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