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 예배 순서로 고백되어야 하나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고 시작되는 사도신경은 예배 순서에서 반드시 고백하는 신경이다. 우연한 기회에 함께 일하는 직장동료의 컴퓨터 좌판 밑에서 이 신경이 너덜너덜해 지도록 읽은 손바닥 만 한 쪽지를 본적이 있었다. 아마 근무하면서 수시로 이 신경을 읽고 또 읽고를 반복한 것 같았다.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방교회와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동방교회 중에서도 서방교회의 전통에 속한 침례교회 같은 교파는 사도신경이 성경에 쓰인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예배에서 고백하지 않는다. 종교개혁자들은 초대교회의 전통과 신앙을 존중하기 때문에 사도신경과 함께 초대교회의 신경을 다 받아들였다.
그러나 2,000년 기나긴 세월 동안 교회 안에서 고백되어졌기에 아무런 의문과 문제제기 없이 교회를 다니는 신앙인이라면 머리 숙여 고백하고 읊조리는 것이 당연한 일일까. 그 내용이 내게 믿어지지도 않고 정말 그럴까라는 의문이 드는데도 말이다.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 정말 천지를 만드셨을까?, 또 그분이 나의 아버지라니 그 시작부터가 정말 궁금하다. 이로 인해 로마가톨릭의 대표적인 신학자는 이 사도신경을 현대인에게 맞게 재해석을 시도하였지만 믿고 부터 봐야 하니 사도신경에 대한 의문만 증폭될 뿐이다.
그렇다면 사도신경은 과연 어떤 역사적 배경에서 나타나게 되었을까? 대부분의 학자들은 2세기 초 로마교회에서 새 신자가 세례를 받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에서 배우고 고백하는 증표에서 기원한 것으로 본다. 그에 가장 가까운 것이 히폴리투스가 215년에 쓴 “사도적 전통”에 나오는 질문 형식으로 된 신앙고백이었고 앙카라의 감독 마르셀루스가 당시의 로마 감독이었던 쥴리우스에게 보낸 희랍어 편지(340년경)에 나타난 신조도 이와 비슷한 요점을 가지고 있으나 마지막 부분에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이 첨가되어 오늘날 사도신경과 거의 비슷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리고 교회사가로 유명한 루피누스(345-410)가 쓴 사도신경 주석(390년경)에 나타난 고대 로마교회에서의 세례 고백문 형식은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이라는 말 대신에 “전능하시고 볼 수 없으시며 수난 받지 아니하시는”이라는 말이 나타나고 “음부로 내려가사”라는 구절이 더해져 현재의 공인 본문과 같고 “영원히 사는 것”에 대한 고백은 빠져 있다.
이 모든 증거들을 기초하여 사도신경의 기원을 로마에서 희랍어 예배로 사용하던 시기(즉 250년 이전)으로 추정하는 학자들이 많고 상당히 초기부터 이와 비슷한 형식의 고백이 회자 되다가 수정되기도 하고 첨가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세례식에서는 그런 신앙 고백의 예들이 잔존해 있는 것을 찾기 어렵다.
또한 지금 사용하는 사도신경과 정확히 같은 형태의 신경이 언제, 어디서부터 사용되었는지를 말하기는 쉽지 않다. 아마도 6세기 말이나 7세기 초 남부 프랑스에서부터가 아닌가 하는 생각들이 지배적이다. 현존하는 공인 본문은 710-724년의 문서인 Priminiis의 De Singulis libris canonocos scarapsus 가운데서 발견됨으로 약 700년경부터 사용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그것이 다시 로마에 의해 받아들여진 것은 9세기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사도신경의 사도적 저작설을 중세 말기에 이르러서는 그 유래에 대해 의문을 갖기 시작했고 토마스 아퀴나스도 그런 의심을 표현했으며, 동방교회와 서방 교회의 연합을 토의한 플로렌스 공의회(1438-1445)에서는 사도신경의 유래에 대해 처음 공적으로 논의하였다. 문예부흥에 기여한 사상가 로렌조 발라(~1457), 치체스터 감독 페콕(~1450) 같은 이는 사도신경의 사도적 저작설을 부인했고 칼빈도 사도신경이 직접적으로 사도들에게 기원했다는 견해를 부정한다(Institutes,Ⅱ.xvi.18).
결론적으로 사도신경은 2세기 초의 세례 시 문답에 대한 고백과 루피누스(345-410)사도신경에 대한 최초의 주석서에 “우리 선조들의 전승”이라고 말하는 것 또한 영국 교회의 공동기도서의 작성자들이나 사용자들 그리고 상당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사도들 한사람 한 조항씩 말해서 구성된 것은 아니다. 로마교회의 세례 시 응답하는 신앙 고백 문에 누구에 의해서인지, 또 정확히 알 수 없는 시기에「사도」라는 명칭이 붙으면서 사도적 권위가 더해져 버린 것이다. 사도신경을 신앙의 고백으로는 인정할 수는 있겠으나 사도들의 신앙고백이라고 받아들이기에는 역사적 근거가 빈약해 무리가 있어 보인다.
더욱 중요한 점은 사도신경이 고백하는 하나님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속성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는데 더 큰 의문이 제기된다. 초두의「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라는 부분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의 속성에 전능성만 있는가! 하나님은 창조의 전능성 뿐 아니라 우주 만물을 섭리하고 주관하시며 종말에는 심판하시는 전능하신 분일 뿐 아니라 한번 언약하시면 어떠한 반대 세력과 권세와도 무관하게 반드시 성취하시는 신실하신 분이며, 자연만물과 역사와 인간을 당신의 뜻대로 다스리시는 주권자이시며, 어떤 허물과 추악함에도 당신의 사랑을 변개치 않으시는 자비로우신 분이시며, 시간과 공간과 형상을 초월하는 영원하신 분이시다.
사도신경의 신앙고백으로 담아내기에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은 너무나 광대하고 절대적인 분이다. 앞으로 사도신경에 대한 로마 가톨릭 신학자(한스 큉)과 칼 바르트의 시도신경 해설을 비교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이들의 인식이 어떠한지 살펴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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