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한국교회 선교의 문제점과 대안<2>
3. 대안
1) 선교의 성경적 의미의 확증-사도행전을 중심으로
선교는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기초한 일로써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친히 행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런 일이다.
앞에서 한국교회 선교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확인한대로 선교를 어떻게 해야한다 라는 실행의 차원을 논하기 전에 먼저 선교란 본질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먼저 확인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열심히 땅을 팠는데 실제 아무런 열매를 얻는 것이 없는 농부처럼 열심히 선교를 했는데 선교의 본질인 진리를 진리답게 증거하지 못한다면 선교의 진정한 열매는 없다. 그래서 무조건 열심히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선교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
선교는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의 성취이다. 하나님은 선교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도모하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위대한 속성의 영광을 드러내신다. 이것만이 진정한 선교의 의미인 것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선교는 여기서 한치도 벗어날 수 없다. 사도행전을 보면 이점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사도행전은 표면적으로 보면 사도들의 선교행적을 기록한 성경이다. 그러나 사도행전을 깊이 있게 보면 결코 그렇게 볼수 없다. 오순절 성령강림이전 복음서에 나타나는 제자들의 모습은 도저히 선교의 주체가 될수 없는 인생들이었다. 그들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의심하고, 부인하고, 배반하는 인생들이었다. 권력의 좌우편을 탐하는 존재들이며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를 부인하고 저버리는 존재들이었다.
그러나 사도행전을 보면 그들은 놀랍게 변한다. 자신의 안전과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에 절절한 인생으로 바뀌었다. 복음을 증거하는 일, 즉 선교사역이라면 어떤 고난도 감수하는 담대한 인생이 된 것이다.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변하게 만들었는가. 그것은 언약대로 오신 성령 하나님의 절대적인 인도에 의한 은혜의 사역이었다.
사도행전은 이렇듯 예수님의 약속대로 오신 성령 하나님의 위대한 행적을 보여준다. 성령 하나님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즉 복음을 기억나게 하고 깨닫게 할뿐 아니라 믿어지게 하신다. 그 핵심은 예수는 참으로 구약에 언약된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참으로 신실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확증하고 있다. 이것이 성경이 증거하는 복음인 것이다.
예수님의 약속대로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자 그들은 그렇게 담대한 제자들로 변했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을 향해 복음을 증거하는 증인이 된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성경이 증거하는 진정한 선교의 의미이다. 이처럼 선교는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기초한 일로써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친히 행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런 일이다. 인간은 그 선교 사역에 복되게 쓰임을 받게 된다.
단순하고도 자명한 말처럼 보이지만 한국교회의 선교는 이점을 온당한 방식으로 주목하지 못했다. 무엇이든지 기초와 기본이 중요하다. 겉으로 보아 건물이 아무리 대단해 보여도 그 건물을 받치고 있는 기초 공사가 부실하면 언젠가는 무너지고 만다. 한국교회의 선교의 열정은 대단하다. 그리고 지금도 열정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제 찬찬히 선교의 신학적 기초를 새롭게 되돌아 볼 때가 되었다.
하나님이 예수를 이 땅에 보내어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시고 자비하신 분이심을 알려주셨듯이 하나님은 예수의 지체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전파하게 하시려고 선교의 동역자들로 부르신다. 요컨대 선교는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하나님의 사업이시다. 죄인중에 괴수였던 바울을 선교사로 부르신다. 아시아로 가고자 했던 바울의 선교 여정을 돌려 정반대 방향인 마게도냐 반도로 가게 하신다. 빌립보에서 루디아를 만나게 하여 복음을 전파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이 선교지를 정해놓으시고 인도해 가심을 알수 있다.
다시 바울의 마음을 움직여 로마를 향해 가도록 하신다. 하나님은 바울이 태어나기도 전에 로마의 시민권을 갖도록 하셔서 로마에서 재판을 받도록 미리 구비시켜 놓으신 것이다. 이로 통해 보면 선교는 하나님의 복되고도 놀라운 사업이요 작품이다. 이를 깊이 깨닫고 이런 놀라우신 경륜을 찬양하는 것이 선교인 것이다.
성경은 어떤 교회적 일이든 간에 인간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배우는 것으로 규정한다. 이점에 비추어 보면 선교의 일 역시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깊이 깨닫고 그를 영원히 찬송케 하시려고 섭리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선교에 대한 성경적 의미이다.
2) 선교의 내용, 즉 복음에 대한 충실성
모든 제반 여건들이 성숙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선교의 본질적인 내용인 복음이 올바르게 증거되지 않는다면 선교의 알맹이는 없는 셈이 된다.
위에서는 선교의 근본적인 의미를 검토했다면 이제 선교의 구체적인 내용을 확인하고자 한다. 두말할 나위 없이 구체적인 선교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내용뿐 만 아니라 제반 여건을 필요로 한다. 쉽게 말해 선교는 총체적인 사업으로서 모든 것이 동원되어 이루어진다. 예컨대 어느 나라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활동을 위해서는 인적 자원, 물질적인 지원, 정치적인 안정 등 이 필수적이다. 그 어느 것 하나도 조건이 갖추어 지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지금 상황에서 북한 선교는 준비만 가능하지 실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정치적인 상황이 아직 가로 막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모슬렘권에 일어나고 있는 민주화의 격변은 하나님께서 모슬렘권 선교를 위한 틈새를 만들어가고 있는 역사라고 볼수있다. 또한 물질적인 지원이 없이도 선교는 실제 불가능하다. 선교의 역사를 돌아보면 언제나 선교활동을 후원하는 물질적인 뒷받침이 있어온 것을 확인할수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해 볼 때 선교는 하나님께서 모든 제반 여건들을 마련하시고 만들어 가시는 총체적인 사역인 것이다. 이런 총체적인 선교의 의미를 전제하고서도 실상 더욱 중요한 것은 선교의 실제적인 알맹이가 되는 복음의 내용이다. 모든 제반 여건들이 성숙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선교의 본질적인 내용인 복음이 올바르게 증거되지 않는다면 선교의 알맹이는 없는 셈이 된다.
실제 선교 현장은 깊이있고 포괄적인 복음을 기다리고 있다. 중국교회는 자생적인 부흥의 역사를 경험해 왔다. 마오쩌뚱이 주도한 문화대혁명(1966~1976)당시의 탄압과 핍박을 거치면서 중국교회 성도의 신앙적 체질은 단단히 단련되어 왔다.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한국교회의 저속한 삼박자 구원류의 기복주의가 아니다. 어설픈 이성의 장난에 의해 성경의 권위를 부정하며 이루어지는 자유주의신학은 더더욱 아니다.
그들은 이미 그들이 알고 있는 초보적인 구원의 복음을 넘어서는 심원하고 광대한 복음, 즉 체계적인 성경해석에 근거하는 성숙한 신학의 지원을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중국 선교의 현장은 어떠한가. 한국교회의 복음이해의 수준을 그대로 옮겨놓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래서 성경의 본질과는 벗어난 신비주의, 기복주의가 그대로 이식되고 있다.
아시아 각지의 선교 현주소는 어떠한가. 필리핀은 새로운 교회의 성장의 기운이 움돋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선교사들의 복음적 지원은 매우 부족하다는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 캄보디아, 몽골등지에는 기독교 학교가 세워지고 힘찬 선교의 기반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베트남과 미얀마, 태국, 인도 등지에도 복음이 전파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일단 선교의 접촉점이 이루어지고난 뒤 선교 현장의 중차대한 과제는 현지인들을 꾸준하게 성숙시켜 갈 만한 복음적인 역량이다. 복음을 증거하는 선교는 결코 일시적인 사업이 될수 없다. 그것은 세대를 이어가는 장기적인 일이 될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선교는 긴호흡을 가지고 이루어지는 일이며 그만큼 깊이 있는 복음을 필요로 한다.
복음이란 바울이 증거하는대로(롬1 :1~6) 구약에 이미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약속한 것이다. 즉 구약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장차 메시야를 통해 당신의 살아계심과 속성을 드러내시겠다는 언약적 계획이 있는 것이다. 그 언약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복음을 설명할 도리가 없다. 그러나 전세계적으로, 특히 한국교회의 복음이해는 지극히 인간중심적 구원론이다. 좁은 의미의 구원의 복음, 즉 예수믿으면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하는 식의 신학적 바탕이 기저에 깔려있다.
그런 정도의 복음이해는 이미 중국교회에서 알고 있는 내용이며 오히려 더 강렬하게 그리스도 중심의 구원론적 복음을 붙들고 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포괄적인 복음의 이해는 그 수준을 훨씬 넘어선다. 즉 영원한 작정에 기초하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언약하시면 반드시 그 언약을 신실하게 역사를 통해 성취해 가신다는 포괄적인 복음이 성경이 가르치는 본래의 진리이다.
이것이 성경전체가 가르치는 언약론적 성경이해이다. 하나님은 구약에서 아담과 삼대언약을 맺으시고 난뒤 다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 언약을 신실하신 방식으로 성취해 가신다. 더 근본적으로는 언약의 실체적인 자손으로서 그리스도가 이땅에 오심으로 온전한 성취가 이루어진다. 이것이 신구약 전체를 아우르는 언약성취사적 논리이며 이를 통해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을 확증한다.
이런 성경적 복음의 이해에 근거하면 선교는 참으로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어가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인도에 의한다는 것을 알수 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신실하셔서 이미 창세전에 예정한 성도인 자기 백성을 결코 놓치지 않으신다. 자신의 백성을 찾아 복음으로 돌아오게 하시려고 성도로 하여금 선교의 열망을 갖게 하시고 선교지로 보내는 것이다.
인간이 복음을 전해 인간을 구원시킬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일종의 과대망상이다. 구원론적 복음이해를 극단적으로 이해하면 이런 문제점에 이르게 된다.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일이요, 실제 복음을 듣고 구원 백성임을 깨닫는 것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에 의한 일이다. 구원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성취, 그를 통한 하나님의 영광의 선포라는 포괄적인 복음이해가 참으로 절실하다.
이점에서 볼때 한국교회 선교는 이전보다 더욱 심도깊은 복음이해에 기초하여 이루어져야 한다. 복음이해의 충실성, 이는 모든 선교 현장이 기다리고 고대하는 것이다. 이미 하나님은 아시아 각지의 선교 현장에 심령의 밭을 갈아 놓으셨다.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영혼들을 준비시켜 놓으신 것이다. 여기에 이 시대 우리들을 언약성취사적 복음 안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다.
3) 결론
한국교회 선교의 관행이 새롭게 변화되어야 한다. 그동안 나름의 열정과 절실성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수많은 선교지가 개척되고, 나름의 열매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의 부족, 더 나아가서 복음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의 결핍으로 선교의 의미는 많이 퇴색되고 있다.
세계 제 2위의 많은 선교사를 파송한다는 자만심에 빠져 있기에는 아시아 각지의 선교현장은 너무도 절박하게 순수한 성경적 복음을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예수믿고 세상적인 복을 받기 원하는 천박한 복음, 인간의 열심을 부추기는 왜곡된 복음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참으로 체계적이고 깊이 있는 복음 진리, 즉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질 신령한 하나님 나라, 그리고 그 모든 일을 통해 드러날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위대하신 속성을 듣기 원한다. 오직 성경이 가르치는 원형적 복음의 재발견, 이로부터 선교는 새롭게 규정되고 시작되어야 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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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창세기부터 룻기까지 |
사도신경 예배 순서로 고백되어야 하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