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예배,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예배는‘의식’이 아니라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보편적인‘삶의 방식
예배는 기독교 생활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내용 중에 하나이다. 그러므로 예배를 어떻게 이해하느냐 에 따라서 우리 신앙생활의 전반적인 방향이 결정된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예배에 대한 생각과 관행은 매우 심각한 탈선의 길을 가고 있다. 기독교 예배라기보다는 이방종교의 예배와 같은 의미로 곡해되고 있다. 그 오해의 본질과 이유는 무엇이며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
1. 문제점
의식주의적 예배의 문제점
예배가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보편적인 삶의 방식이 아니라 특정의 시간에 특정의 형식을 따라 이루어진다고 믿는 의식주의적 경향이다. 이는 구약의 제사 의식을 복음적으로 승화시켜 해석하지 못하는 성경해석적 오류에서 기인한다. 즉 구약 의식을 신약의 예배모델로 간주하는 오류이다. 마치 목사가 구약시대의 제사장처럼, 교회당을 마치 성전으로, 헌금이 마치 예물인 것처럼 오해한다.
이는 복음에 대한 심각한 훼손이다. 구약의 제사 의식은 이제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완전히 성취되었다. 구약의 제물이었던 양이나 소는 장차 영원한 제물의 그림자로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성취되었다. 구약의 제사장 역시 대제사장이신 예수의 그림자로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까지 승천하심으로 성취되었다. 구약의 성전은 신약의 예배당이 결코 아니다. 구약의 성전은 예수님의 부활을 상징하는 그림자로서 완전히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신약 시대 예배를 구약적 제사 의식처럼 간주하는 것은 오류이다. 이제 신약시대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신령한 삶의 예배로 바뀐 것이다. 잘라 말해 신약시대의 예배는 결코 의식이 아니다.
특정시간과 공간에서 예배가 이루어진다는 오류
구약에서의 제사 의식을 그리스도 사건으로 승화시켜 해석하지 못하고 신약 시대 의 연장선에서 이해하고 실행하는 오류는 예배를 특정시간과 장소에 국한시키는 치명적인 오류를 야기한다. 예배란 하나님을 알고 경외하는 보편적 삶의 양식을 의미한다. 따라서 특정시간이나 특정 공간에 결코 한정될 수 없다. 어찌 무소부재하신 전능자 하나님을 경외하는 예배가 시공간에 한정될 수가 있겠는가?
사도 바울은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가르쳤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란, 목하 논의의 주제인 예배적 삶에 적확하게 해당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예배적인 삶이란 특정의 시간과 공간에서의 의식이 아니라 성도 삶의 모든 영역, 모든 활동을 통해 이루어지는 보편적인 행위라고 보아야 한다.
진정한 예배정신의 실종
예배가 예배당이라는 특정 공간, 특정시간에서 인간 목사의 예배 집전에 의해 드려지는 것으로 이해될 때 바울처럼 옥중에서도 단절될 수 없는 치열한“삶으로서의 예배 정신”은 실종된다. 그리하여 예배가 예배당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지극히 편협적인 차원으로 이해되어 짐으로써 예배당 밖의 삶은 자연적으로 하나님의 경외하는 예배와는 무관한 세속적 삶이 되고 만다.
예배란 살아계신 하나님을 말씀을 통해 깨닫고 만사가 그분의 뜻에 의해 진행됨을 인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의 삶 전부가 마땅히 예배적인 삶으로서 이해되는 것이 합당하다. 바울의 표현대로“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않는다”(행 17: 24) 또한“무엇이 부족한 것 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시다”
인간이 지은 공간에 갇힐 수 없는 하나님, 그 하나님은 온 우주를 통치하시되 만물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분이심을 바울은 역설했다. 하나님의 위대한 주권적인 통치를 전 삶의 영역에서 생생히 느끼고 살아가는 삶 자체가 진정한 예배이다.
2. 성경이 가르치는 신령한 예배
예수님의 예배관
수가성 여인과의 대화를 통해 예수님은 예배가 특정의 시간과 공간에서의 의식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수가성 여인은 예수님께 말하기를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른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나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한다”고 말씀하시면서“하나님은 영이시니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고 말씀하셨다.
요컨대 예수님은 예배가 특정장소에서 행해지는 것, 즉 이 산이나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명확히 했다. 진정한 예배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는 행위가 아니라 신령(spirit)과 진정(truth)으로 드리는 것 즉 영적인 것이요, 진리적인 것임을 못박았다. 다시 말해 예배란 성령의 인도함에 의해 진리되신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아 경외하는 삶임을 분명히 말씀하신 것이다.
바울의 예배관
바울은 로마서에서 구체적으로 “영적 예배”의 의미를 설명한다. 로마서는 인간들이 모두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진노받아 마땅한 존재이지만 하나님의 언약적 성취로 오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의를 덧입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성도로 하여금 진정한“영적 예배”(롬 12:1)를 가능케 한다.
바울은 “영적 예배”의 일차적 조건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으로 가르친다. 이 얼마나 중요한 내용인가! 도무지 기독교 예배는 하나님의 뜻 즉 진리를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런 다음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각 지체의 다양한 기능과 은사를 따라 다른 지체를 섬기며 살아가는 삶을 증거한다. 그것이 곧 주를 섬기는 일이 됨을 로마서는 가르친다.
이렇듯 로마서가 가르치는 예배는 진리의 인격적인 깨달음에 토대를 둔 구체적인 섬기는 삶을 의미한다. 결코 특정 공간에서의 형식적인 의식이 아니다.
3. 예배개혁의 방향
1) 예배의 근본 전제로서 ‘하나님 바르게 알기’
기독교 예배가 의식이 아니라는 사실은 먼저 올바른 예배의 전제조건이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아는 것이라는 데서 확인된다. 예배는 맹목적인 열심 혹은 어떤 구체적인 행위를 우선시 하는 것이 아니다. 모름지기 예배는 위대하신 하나님을 성경을 통해 구체적으로 아는데서 시작된다. 그래서 올바른 기독교 예배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올바른 말씀의 교육과 이해가 필수적이다. 따라서 진리가 올바르게 증거되지 않는 곳에 진정한 예배는 없다.
2)‘의식’으로 부터 ‘삶의 전영역’으로의 전환
예배는 의식이 아니라 삶 그 자체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것이 이방종교의 예배와는 현격하게 구분되는 점이다.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은 온 우주의 통치자 모든 삶의 영역에서의 주관자이시다. 이점에서 예배는 결코 예배당 안에서 국한될수 없다. 가정도, 직장도, 학교도, 문화 활동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배우는 신령한 예배의 삶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주장이 예배당 생활의 중요성을 약화시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예배당에서 말씀을 배우고, 성도들 간에 깊은 친교와 섬김의 삶은 너무도 중요하다. 그런 토대위에 전 삶의 영역으로의 예배가 가능해 질 것이다.
3) 목사는‘제사장’이 아니라 말씀 증거하는‘종’
목사는 결코 구약적인 의미의 제사장적 역할이 아니다. 구약의 제사에는 반드시 제사장이 있어야 제사가 가능하다. 구약의 제사장은 하나님과 성도를 중보하는 그리스도의 모형적인 존재이다. 목사는 그런 의미의 역할을 수행하는 직분이 결코 아니다. 목사는 말씀을 올바르게 가르치는 소중한 하나의 직분이다. 따라서 성도들도 목사를 그 이상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목사는 예배의 주체도 중심 인물도 아니다. 예배의 주체는 오직 성령 하나님이시며 목사는 말씀을 받드는 하나님의 종일뿐이다.
4) 예배당은‘성전’이 아니라 소중한‘사용장소’
예배당은 오로지 예배드리는 유일의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성도들이 친교를 나누는 소중한 장소로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엄밀히 말하자면 예배당이라는 표현 보다는 교회당이라는 표현이 더욱 좋다. 예배는 교회당 뿐 만 아니라 가정이나 직장 어디서라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예배당은 결코 구약적인 의미의 성전이 될수 없다. 그것은 구약 성전의 성취이신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훼손하는 엄청난 오류이다.
5) 연보는‘예물’이 아니라 은혜를 나누는 귀한‘방편’
연보(헌금)에 대한 그릇된 이해는 한국교회가 병들게 된 결정적인 이유 중의 하나이다. 성도들이 행하는 연보는 구약적인 의미의 예물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믿음의 소중한 표현이며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함께 나누는 삶의 일환이다. 그러므로 연보란 구약의 예물처럼 누구에게 갖다 내는 것이 아니다. 연보는 자신의 믿음을 따라 자신이 의미있게 쓰는 것이다. 이점이 반드시 회복되어야 구체적인 교회개혁이 가능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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