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작성일 : 12-04-16 15:41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28,참된 소망 있나?


낙심하고 실망하게 되는 이유는 마음을 참된 존재에 두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에 마음 둘 데 있는가? 아마 그 누구도 장담하지 못할 것이다. 세상에서 자기 자신의 소원을 이루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영원한 것이 아니면 다 헛된 것이다. 모든 사람은 참되고 영원한 것을 바라고 있다. 성경은 그러한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참되고 영원한 소망을 성경은 제시하고 있다. 이것의 근거는 참으로 존재하는 영원한 생명에 기초한 것이다.

1)죽음에도 있는 소망(잠14:32)

 참되고 영원한 생명이 있으면 죽음이 자리 잡을 수 없다. 시간 과정에서 죽었다 할지라도 참 생명이 그것을 삼킨다고 한다(고후5:4). 영광스러운 찬란한 빛이 존재하는 곳에 어두움이 발붙일 수 없는 것과 동일하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분명하게 알게 되면 될 수록 의인은 죽음 앞에서도 소망이 있게 된다. 이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①인생의 전부가 아닌 죽음
 생로병사(生老病死)는 눈에 보이는 몸의 변화를 논리화 한 것이다. 땅 위에 나타난 몸을 시작으로 해서 구부러져 눕고 땅 속에 들어간 것 까지를 시간적인 순서를 따라 나타낸 것이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 영원함을 증명해서 밝히는 진리가 세상에 어디 있는가? 이것은 아무도 보고 들을 수 없는 진리이다. 진정한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지면서 더욱 분명히 점진적으로 알아가게 된다. 나무도 땅위에 오륙백 년이나 1000여년까지 뿌리를 박고 있다. 이러한 현상 자체를 사람에 비교하면 허무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간상에 존재한 것은 진정한 가치를 가질 수 없다. 시간적인 것은 가치의 본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원한 것만이 헛되지 않으며 참으로 값진 것이다. 죽음도 시간상의 하나의 단락임을 성경은 말한다. 그 죽음은 영원한 생명을 기초로 한 것에서 하나의 과정이고 단락이지 전부가 결코 아니다.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해서 본다면 그렇게 볼 수밖에 없다. 인생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가? 의식주(衣食住)가 인생의 본질인가? 들판의 백합꽃이 솔로몬의 옷보다 낫다는 실례적인 방법으로 성경은 인간의 근본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증명해주고 있다.

②잠자는 것과 같은 죽음
푹 자고 깨어날 수 있다는 것은 일해야 하는 인간에게 큰 희망을 준다. 자다가 깨거나 깨었다가 자는 것은 시간상의 순서이다. 성도가 중생하여 보이지 않게 존재하는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영적으로 죽었다가 살아났기 때문이다. 영적으로 죽은 것은 진정한 깨달음이 없이 자고 있는 것과 동일하다. 잠에서 깨어나는 것과 깨닫는다는 것은 깊은 관계가 있다. 인간이 잠에서 깨어나서 활동하는 것 중에서 자기가 왜 존재하며 무엇으로 말미암아 존재하는가를 깨닫고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는 의미와 바로 통한다. 성경은 인간의 죽음을 두고 잔다고 전한다. 이것은 진정한 생명이나 부활에 기초해서 본질적으로 전하고 있는 셈이다. 인간은 잠을 통해 죽음을 경험하는 절호의 기회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2)날에도 있는 소망(고후4:16)

누구나 미래를 알고자 한다. 특히 자기의 미래를 알고자 갈망하고 있다. 이것에는 예정론이거나 숙명론적이거나 날에  대한 기대감이 들어있는 셈이다. 성경은 낮은 낮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한다고 선포하고 있다(시19:2). 이러한 심오한 진리는 구약성경에서 신약성경에 걸쳐 점입가경의 경지로 선포되어 있다. 그것이 바로 영원성을 기반으로 해서 전하는 날에 대한 의미이다.

①날로 새로워지는 속사람 
 사람들이 육신에 소망을 둔다면 허탈감을 맛보게 되지 않을까? 바울사도는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에 육신은 낡아지고 그 장막이 무너지게 되지만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짐을 확증하였다. 속사람이 있고 그 속사람이 자기의 본질임을 알아가면서 더 분명한 소망을 가지게 될 것은 자명한 일이다.

②날의 근원을 아는 지혜
날이나 시간이 있다고 한다. 인생의 과정을 통해서 시간의 짧음이나 없는 것과 같은 날을 경험한다. 시편기자는 영원한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인간의 땅에서의 연수를 70이나 80까지임을 고백하고 노래하였다. 이러한 진실 앞에  인간의 날들을 셀 수 지혜를 얻을 수 있기를 기도하였다(시편90편).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근호 목사 (중어중문학박사)
이메일 : yan825@hanmail.net

문화칼럼/어느 비오는 날의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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