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어느 비오는 날의 단상
비가 오면 내 마음은 가끔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한다. 아마도 초등학교 5학년 어느 비오는 여름날이었던 것 같다. 6.25전쟁을 겪은 후라 너 나 없이 가난하고 누추하며 암울했던 시절이었다. 우산도 귀한시절이라 비를 맞으며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 온 나는 마루에 쪼그리고 앉아서 당시 많이 읽히던 소공녀라는 어린이 소설을 읽고 있었다.
내가 주인공이 되어서 세라(주인공이름)의 예쁜 옷을 입고 커텐이 드리워진 고운 방을 돌아다니며 세라가 웃으면 같이 웃고 슬퍼하면 같이 슬퍼하면서 남루한 현실을 아름답게 채색해 가고 있었다. 그러다 깜박이 잠이 들었고 천둥소리에 놀라 잠이 깨었던 것 같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했다. 처마 밑으로 뚝뚝 떨어지는 빗물사이로 뿌옇게 보이던 산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 늘 그 자리에 있던 산이었는데 도무지 현실감이 없었다. 저산이 무엇이란 말인가? 왜 저기 있는가? 저것은 진짜 있는 것인가? 또 저 나무들은? 풀들은? 진짜를 보고 있는 것인가? 환영을 보고 있는 것인가? 진짜인가? 환영인가?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모든 것이 전부 낯설어지기 시작했다. 저기 보이는 마당은 무엇인가? 진짜 있는 것인가? 마당 가운데 우뚝 서서 물을 뿜어대는 저 펌프는? 거기서 나오는 물은 또 무엇이며 왜 저리도 부드럽단 말인가? 잠결에 떨어져 나간 소설책도 책 옆에 놓여있던 책가방도 마루에 있던 크고 작은 초라한 물건들도 모두 모두 풍선처럼 붕붕 날아다녔고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천둥소리는 모든 것을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 생각이 내게 이르자 점점 답답해지고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내가 누구지? 왜 여기 있지? 나는 진짜인가? 환영인가? 내 몸이 나인가? 내 마음이 나인가? 마음은 내 몸 어디에 있는가? 나는 있는 것일까? 없는 것일까? 없는 것일까? 있다면 왜있는 것이며 없다면 저 부엌에 계시는 어머니는 그럼 누구시란 말인가?
짧은 시간에 일어난 이 복잡하고도 힘겨운 것들이었다. 가슴을 치며 소리를 내어 울자 놀란 어머니께서 부엌에서 달려오셨고 “나쁜 꿈을 꾸었구나. 곧 괜찮아 질 거다”라고 말씀하시며 가만히 안아주셨다.
그러나 그 답답함과 망치로 맞은 듯한 강열한 질문들은 마치 심장에 감전이라도 되는 듯 나를 가끔씩 힘들게 했다. 무엇을 보더라도 저것은 진짜인가 환영인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을 늘 가지게 되었으며 숙제를 못한 학생처럼 불안해하기도 했다.
일상에 묻혀 지내며 그 날의 기억은 가끔씩 떠올랐으나 심장이 감전되는 듯한 강열한 느낌들은 차츰 옅어져 가며 잊혀져 갔다. 그러나 나는 왜 사는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언젠가 죽는다면 나는 없는 것 아닌가? 시간상의 문제일 뿐 결국 없어질 나를 있다할 수 있는가? 라는 근원적인 질문은 사라지지 않았다.
세상 학문을 존재의 이유를 자아실현 인격의 완성 행복추구 등등으로 말하지만 무엇이 자아실현이며 인격의 완성인지 또 행복을 추구해서 무엇을 하자는 것인지 도무지 수납이 되지 않았다. 차라리 ‘왜 사냐 건 그냥 웃지요’ 라는 어느 시인의 고백이나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느냐’ 라는 유행가 가사가 더 솔직하게 느껴졌다.
그러던 중 어쩌다 나는 ‘언약성취사적 성경신학’을 만나게 되었고 성경을 통해 이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얻게 되었다. 그때의 통쾌함을 나는 이 세상의 언어로는 표현할 길이 없다. 성경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확증케 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그날의 강열한 상념들을 주신 것 같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 의해 지음 받았고 결국은 없어진다는 사실을 성경은 말하고 있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을 계시하기 위해 지어 놓으신 피조 세계의 모든 것을 수학 공식으로 표현해 보아도 있다고 느끼는 모든 것들이 결국은 아무 것도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즉 하나님의 존재 방식인 영원세계는 무한대(기호)이며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 무엇이 아무리 크다 해도 답은 모두 0인 것이다.
태양 모든 별들의 합 9999 경
-------- = 0 -------------- = 0 -------- = 0
무한대(기호) 무한대 무한대
등등 이처럼 존재한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존재방식인 영원에 비하면 모형과 그림자일 뿐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0인 것이다.
이는 과학으로도 증명되지 않았는가? 어떤 물건을 나누고 나누어 더 이상 나눌 수없는 입자(쿼크)로 되었을 때 그 입자를 살펴보면 텅 비어 있다는 것이다. 영원세계에서 잠깐 나와 피조세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배우다가 다시 영원세계로 돌아가는 우리들에게 보이는 것도 모두 하나님을 배우는 교재 이상의 아무것도 아님을 성경은 말하고 있기에 이제 나는 어린 시절의 비오는 날 경험한 그 답답함에서 벗어 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의 그 강열한 경험이 있었기에 오늘 얻은 해답의 소중함이 더욱 크고 통쾌하게 느껴져 참으로 행복하다.
보이는 것이 모두 결국은 0일진대 무엇에 미련을 두고 집착을 할 것인가? 재물이나 명예 권력 모두 지나가는 바람인 것을...그래서 지혜자 솔로몬은 하나님을 모른다면 해 아래서의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 하지 않았는가?
광야같은 세상에서 하나님을 여호와로 배우다가 우리의 본향 영원한 세계로 돌아갔을 때 비로소 모든 것이 참이며 참으로 존재한다는 해답을 얻게 된 그때부터 나는 비오는 날을 좋아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존재 문제가 제기된 그날의 경험 때문인 것 같다.
그 비가 안개비이든 보슬비이든 소나기이든 나는 무조건 좋다. 뒤엉켜있던 마음 밭이 차분히 정리되면서 마음이 한없이 너그러워 진다. 똑같은 마음 밭이요 사물이건만 미올 때 달라지고 달라 보임이 참 신기하다. 어째든 나는 비오는 날이 참 좋다.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 사역을 확증한 언약성위사적 성경신하기 너무 고맙고 좋다. 정말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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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교회당, 하나님이 계시는 곳인가? |
28,참된 소망 있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