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교회당, 하나님이 계시는 곳인가?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행 17:24)
신전(神殿)에 계시는 하나님?
교회당에 나오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오늘 하나님의 전(殿)에 나오신 성도 여러분’이라는 인사말로 예배를 시작하는 목사. 그래서 육일동안 세상에서 살다가 칠일 째 성전에 나와서 하나님을 만나 뵙고, 용서를 빌며 축복을 받고,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이러한 행태는 이교도에 물든 예배문화의 전형이다. 마치, 신은 특별한 장소에서 만날 수 있기 때문에 그곳을 신전으로 둔갑시켜 놓고 거기에서 제사하는 형극이다.
기독교의 특징은 신을 모시는 특정한 장소나 공간이 지정되어 있지 않으며, 의식과 절차에 따라 제사를 드리듯이 신에게 예배하지 않는다. 그런데 다수의 교회들은 교회당을 신성한 장소로 생각하고 있으며, 그곳에서 신에게 경배를 드리기 위해 모인다. 하나님은 일정한 공간에 좌정해 계시면서 예배나 경배를 받으시는 분이 아니시다. 기독교의 신은 죄악된 세상과 동떨어져 하늘에만 계시거나 일부 특정한 장소에 좌정하신 분이 아니다.
기독교의 특색중의 하나는 건물을 성전(聖殿)이나 성당(聖堂)으로 신성시해서 숭배하거나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데 있다. 예수께서도 유대인들이 숭상하고 있는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서 당신이 허물고 삼일 만에 다시 세우시겠다고 선언하신바 있다(요 2:19~21). 또한 AD 70년경에는 로마에 의해서 처참하게 파괴될 것을 예언하신 바도 있다.(눅 21:5~6) 사도 바울 역시 아레오바고 법정에서 아테네 사람들을 향해서 기독교를 설명하는데,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건축한 건물에 예속되지 않음을 천명한바 있다.(행17:24) 이와 같이 초대교회시대에는 어떤 특정 건물을 신성시하여 그곳에서만 신(神)을 모시거나 제사(예배) 드리는 행위가 없었다.
도리어 초대교회시대에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는 일을 하셨고(눅 21:37~38), 사도들도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행 5:42)”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행 20:20)라는 말과 같이, 그들의 주된 임무는 성전, 가정집, 회당을 막론하고 어디에서든지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는 성경을 가르친다는데 있다. 그래서 초대교회시대의 성도들은 ‘교회에 간다’라는 뜻을 예루살렘 성전이나 특정 건물을 떠올리기 보다는 ‘모임’ 자체를 의미하는 문구로 이해하였다.
그렇다면 초대교회시대에 전무(全無)했던 건물 중시사상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가. 초대교회시대에는 건물과 장소 보다는 ‘모임’ 자체를 중시했고, 제사의 개념이 아니라 성경을 배우는 학습에 치중했다. 그들은 주로 회당과 가정집에서 모이거나 장소가 비좁을 때는 가정집을 개조 확장해서 사용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그들에게 중요한 점은 모이기 위한 장소가 아니라 모임을 통한 성경교육에 있었다. 그런데 4세기 유럽일대를 장악했던 로마의 콘스탄누스(Constantinus; 재위 306∼337) 황제는 박해받던 기독교를 공인하기 시작했다. 그는 비잔티움에 그리스도교적 도시를 건설하고, AD 327년에는 각 지역에 교회건물의 건축칙령을 내렸다. 그리고 죽은 자가 신성한 장소를 만든다는 설에 근거해서 죽은 자를 숭배하는 성인숭배와 유품매매를 하게 하였으며, 회중은 교회건물 출입문에 분수탑을 설치하여 손을 씻는 정결의식을 거치게 하였다. 이때부터 교회는 찬란하게 포장된 건물이 성전으로 둔갑하기 시작했고, 그곳에서 신에게 예배하는 제의적인 행위가 만연되게 된 것이다.
이교도의 특징은 건물을 숭상하고, 그 건물에 신을 모시고, 그곳에서 예배나 제사를 시행한다. 그래서 특정한 자리에 신상을 모셔놓고, 그곳에 나와야만 신을 만날 수 있으며, 신에게 제사(예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불교도 숭배대상인 부처를 모셔놓은 법당에서 중요한 예불이 실시되고, 카톨릭 교회 역시 거룩한 성당(聖堂)에서 미사가 집전(執典)된다. 이들은 모두 법당이나 성당의 건물을 신성시하고, 그곳에서는 마치 신을 접하듯이 예를 갖춘다. 불교는 부처상을 조각하여 법당에 모신다. 카톨릭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상을 조각하여 강단 중앙에 설치한다. 개신교는 단상 정중앙에 십자가를 세워놓고, 의자 셋을 배치하거나 제단을 꾸며 놓기도 한다. 그래서 신자들은 자연스럽게 청중석과 강단을 구별하게 되고, 정면에 설치된 조각물을 신격화해서 빌게 된다. 타 종교는 말할 것도 없지만, 기독교의 행태는 가히 가관이다.
기독교 신자들은 주일날이면 자연스럽게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서 성전에 나아온다. 이에 뒤질세라 목사들은 오늘은 거룩한 성일(聖日)이고, 하나님의 전(殿)에 나왔다고 선포한다. 이에 대해 어느 누구하나 반박하거나 이교(異敎)적인 미신행위라고 지적하지 않는다. 이제는 거룩한 주일에 하나님의 집인 성전에 나온다는 것이 기독교의 통념과 관례가 되어버렸다.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건축물에 예속되거나 공간의 지배를 받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우주와 만물에 공간을 초월해서 존재하시는 영원한 신이시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도 계시고, 우주와 만물 전 영역을 운행, 지배, 통치하시는 분이시다. 조잡한 건물을 지어놓고, 그곳에 마치 하나님을 모셔서 예배하는 것처럼 신자들을 기만하면 안 된다. 교회건물은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사용하기 용이하도록 만든 것이다. 이것을 마치 신의 이름을 빙자해서 “성전건축”이라 명명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성전은 건물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의 지체가 하나 된 신령한 몸을 가리킨다.
기독교는 모든 이교(異敎)에서 찾아볼 수 없는 영원한 신을 경외하는 종교이다. 이 신(神)은 어느 일정한 공간이나, 시간에 한정되지 않고 영원히 존재하시는 분이다. 물론 구약시대에는 예루살렘이라는 지정된 장소에서, 그 중에서도 지정소에서만 신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었다. 하지만 구약의 성전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건축하게 될 신령한 성전에 대한 모형인 것이다. 이 성전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요 2:19) 그의 지체들과 한 몸을 이룬 교회를 의미한다. 바울은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라고 증거한 바 있다. 오늘날의 건물, 즉 교회당(敎會堂)은 용어 그대로 말씀을 가르치기 위해서 모이는 장소, 그 이상의 의미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성경을 가르치기 위한 교육시설을 하나님의 전당으로 왜곡하거나, 그곳에 나오는 것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처럼 호도(糊塗)해선 안 된다.
교회당을 건축하려면 학생들의 필요에 따라 학교를 세워야 하는 것처럼, 교인들의 필요에 따라 사용할 공간을 확보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부여해선 안 된다. 교회당은 교인들이 모여서 성경을 배우고, 서로 교제하기 위한 만남의 장소 이외에 신성한 의미를 가미한다는 것은 이교적인 발상이다. 한국교회는 이단이 무엇인지도 정확하게 가늠하지도 못한 채 구호만 외쳐왔다. 이단은 내용적인 면에서도 확고히 분별해야 하지만 우선 가장 기본적인 ‘건물’의 용도에서부터 재정리가 되어져야 할 것이다. 이제는 교회당 건물과 하나님을 결부시켜서도 안 되고, 건물의 규모나 치장에 과도한 투자나 의미를 부여해서도 안 된다.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은 건물의 규모와 크기가 성공의 바로미터가 되고, 참교회의 상징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지금부터라도 건물의 환상에서 깨어나야 할 것이며, 건축을 위해서 신의 이름을 빙자하지 말고, 건축을 위해서 교인들의 주머니를 강탈하는 비열한 행동은 삼가야 할 것이다.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행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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