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예배,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인가?
롬 12:1~8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제사(祭祀)를 드리는 교회?
오늘날 변질된 예배는 마치 신에게 제사를 드리듯이, 죄인된 청중들은 엄숙하고 진지한 태도로 교회당에 입장하여 고개 숙여 회개하고, 헌금을 하나님께 바치며, 일방적으로 선포되는 목사의 의도적이며 주관적인 설교에 화답하고, 목사만의 전유물인 축도를 받음으로서 경건한 의식이 끝을 맺는다. 이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공적인 예배이다. 예배의 잘못된 문화는 하나님이 계시는 하나님의 집에 나와서 하나님께 예물(헌금)을 드리고, 우아한 성가대의 찬양과 청중들의 회개기도와 함께 하나님의 말씀으로 명명된 도덕적 교훈과 훈계와 책망을 받으며 하나님께 신고하는 것과 유사하다.
한국교회는 다수가 예배의 본질에서 벗어나 막중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릇된 예배의 면모를 살펴보면, 거룩한 날(聖日)에 거룩한 장소(聖殿)에 모여서 성스러운 노래를(聖歌) 합창으로 신에게 올리고 거룩한 신(神)의 뜻과 음성을 신의 대리자이며 제사장인 목사를 통해서 전달받으며 제물과 유사한 성격의 십일조를 신에게 받치면서 속죄와 복을 기원하고, 경건한 의식에 맞추어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행태를 하고 있다. 이러한 예배행위는 마치 주술적인 제사행위와 유사하며 타 종교의 예배의식과도 별다른 차이가 없어 보인다.
불교에서는 신성시하는 법당에서 부처상을 모셔놓고 나름대로 정해진 의식에 맞추어 제단과 헌금함을 차려놓고 예불(禮佛)을 드린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개신교 보다 훨씬 더 엄숙하고 장엄하게 꾸며놓은 거룩한 성당에 모여 복잡한 절차와 예식에 따른 제사성격의 미사(Missa)를 신부가 집전한다. 이들의 특징은 거룩한 장소가 구비되어 있고 속죄와 은총을 위한 거룩한 제물(헌금)을 바쳐야 하며 신의 대리인 역할을 하는 제사장 격의 중재자가 필요하고 절차와 의식을 중시한다. 이들의 공통점은 신성한 장소, 신성한 제물, 신(神)과 인간의 중보인 집례자를 통해서 신들에게 제사를 드리는데 있다.
기독교 예배의 잘못된 점도 여기에 있다. 이교도와 같이 교회당 건물을 성전처럼 여기며 하나님께 헌금(제물)을 바치고 신의 대리자인 목사가 신의 뜻을 전달하며 예배의 절차와 의식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물론 구약시대의 제사는 예루살렘 성전과 제물(십일조) 그리고 제사장에 의해서 집전되었다. 그러나 구약의 제사제도는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실 예표로서의 모형과 그림자이다. 즉, 보이는 예루살렘의 건물성전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과 그의 지체인 성도를 가리키고 제물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몸(생명)을 뜻하며 제사장은 백성들의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실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구약의 제사형태와 비슷한 예배행위를 실행한다는 것은 구약성경에 대한 해석학적 오류이며 나아가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을 곡해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리스도께서는 구약의 제사에 대한 언약을 성취하셨다. 즉, 당신이 제사장이 되셨고, 당신의 생명을 제물로 드리셨으며, 당신이 부활 승천하시어 하나님께 나아가심으로서 구약의 제사언약을 실체적으로 성취하셨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당 건물을 성전으로 명명하고, 목사가 제사장으로 자처하며, 인간들이 사용하는 헌금을 하나님께 받치는 제물로 둔갑시킴으로서 예배의 본질을 왜곡하는 것이다.
굴절된 기독교의 예배의식은 4세기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재위 306∼337)에 의해서 조직된다. 그는 초대교회의 예배모범을 변질시킨 주범이다. 초대교회는 외형적인 건물의 가치보다는 모임 자체에 의미를 두었으며, 유대적인 제도와 이교적인 의식을 탈피했으며, 오직 성경공부와 성도간의 교제에 치중했다. 그런데 4세기에 접어들면서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서 의식과 제도를 중시하는 이교적인 제사행위가 정착되었다. 그는 건물을 치장하기 시작했으며 성가대를 조직해서 예배의 분위기를 엄중하게 조장했고 목사를 신(神)의 대리자로 승격시켰으며, 목사로부터 신의 뜻을 전달받아 교인들로 하여금 속죄의 예물과 회개의 기도를 신에게 드리는 주술적인 예배로 변모시켰다.
기독교 예배의 특징은 삼무(三無)이다. 건물 성전이 없으며, 인간 제사장이 없고 속죄의 예물이 없다는데 있다. 건전한 예배는 건물에 예속되거나, 정해진 날에 국한되거나, 지도층에게 구속되거나, 헌금을 신에게 바치는 행위가 아니다.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고, 제도화된 의식과 법적인 굴레에서 벗어나 언제, 어디에서나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총체적인 삶의 체계이다. 실체적인 예배는 구약의 제사형태와 같이 하나님께 드리거나 바치는 행위가 아니다.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신앙이며,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며 선한 싸움을 싸우며 살아가는 삶, 그 자체이다.
예배란 말은 ‘순종하다’, ‘존경하다’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하나님을 존경한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예배는 신에게 제사를 드리듯이 의식과 제도에 의해서 시행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는 것이다. 구약적인 제사는 철저한 의식과 제도에 예속된 종교적인 행위이다. 하지만 신약의 예배는 의식과 제도에 따라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예배의 주체이신 그리스도의 뜻을 분별하는데 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4)고 하셨다. 이 말은 예배하는 자는 성령(신령)과 진리(진정)이신 그리스도안에서 예배해야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안에서 예배한다는 말은 예배하는 자가 그리스도의 뜻과 사상을 배우고 분변한다는 의미이다. 이에 대해 바울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라고 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 자들의 몸을 하나님께 거룩한 제물로 드리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몸을 드린다는 것은 일반적인 육체적인 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 거듭나고 중생한 몸을 뜻한다.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 자들이 드리는 영적예배의 요소는 첫째, 그리스도를 머리로 지체된 자들이(성전)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뜻을 추구하는 것으로서 사상의 일치를 의미한다.(롬12:2) 이 말은 진리와 비(非)진리, 진실과 거짓,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 참된 것과 헛된 것을 분별하는 가치판단을 의미한다. 둘째,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믿음의 분량 따라 그리스도의 뜻을 생각하는 것이다. 이 말은 자신을 과대하게 평가해서 자기의 욕심을 추구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뜻에 주목하여 이해하며 사는 것을 뜻한다.(롬 12:3) 셋째,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 따라 서로 봉사하며 사는 것이다. 이것은 성도의 실제적인 행위를 나타내는 말로서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위해서 건덕(健德)을 세우며 살아가는 것이다.(롬 12:4~8)
이와 같이 기독교의 올바른 예배는 의식과 제도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생각하며, 봉사하며 살아가는 삶 자체이다. 초대교회의 예배 역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생각하기 위해서, 모이면 성경을 배우고 상고하면서 지체들이 함께 서로 봉사 및 교제를 하는 데에 있었다. 초대교회의 예배는 어떠한 절차와 의식도 가미되지 않았으며 일정한 공간에서만 진행되지 않았고 어떤 날에 한정되거나 예속되지 않았으며 찬란한 건물이 교회의 상징물이 되지도 않았다. 오직 진리의 말씀을 배우고, 아는 것 믿는 것이 하나 된 지체들의 교제가 전부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예배는 제사가 아니라 성도들의 삶이다. 예배는 예전을 통해서 신에게 헌납하는 제사가 아니라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제 기독교는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예배 문화부터 개혁해야 할 것이다.
요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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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기도,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
1)교회당, 하나님이 계시는 곳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