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의식(儀式)을 벗어야 교회가 산다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따라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를 그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히 9:9~10)
AD 4세기를 전후해서 형성된 기독교의 의식(儀式)주의 문화는 기독교의 본질을 왜곡시키며 교회의 부패와 몰락에 일조했다. 16세기 종교개혁의 정신은 로마 카톨릭주의자들의 제도와 의식에 대한 혁명적인 도전이었다. 당시의 기독교문화는 교회당의 웅장한 건축양식과 내부의 호화로운 치장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전(聖殿)으로 둔갑했으며, 예배에 복잡한 순서와 권위적인 성례를 가미시킴으로써 영적예배의 본질을 훼손시켰고, 교황과 주교들의 권위를 공적으로 인정함으로써 직분의 형평성을 파괴했다.
개혁주의 교회는 종교개혁 이후 500여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로마 카톨릭교회의 의식주의를 대항했던 개혁정신은 퇴락했다. 도리어 교황주의자들의 의식을 답습하고 추종하면서 부패의 일로(一路)를 걷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교회의 대형화(대형교회)는 대표적인 사례이며, 예배에 첨가된 다양한 의식 및 목사의 권위와 횡포는 극도에 달했다. 한국교회의 실상은 세습과 횡령이 판을 치고, 바리새파와 같은 종교적인 세력을 등에 없고 오만불손의 추태를 부린다.
초기 기독교의 종교적인 특징은 건물을 성전(성당)으로 숭상하거나 장소를 중요시하지 않았으며, 복잡한 절차를 통해서 엄숙한 분위기를 조성하지 않았고, 지도자들은 오직 성경을 가르치는 일에만 심혈을 기울였다. 그들은 아무 곳에서나 모이기에 적합한 곳이면 모임을 가졌으며 별다른 절차와 의식 없이 성경만을 강론했고, 목사나 장로의 권위를 호도(糊塗)하여 성도들 위에 군림하거나 기만하지 않았다. 모든 직분이 평등했고 각자의 은사에 따른 직무에만 충실했다.
한국교회는 성경강론 보다는 예배의 절차에 치중하고, 성도들의 영혼 보다는 교회의 목표달성에 주력하고 있다. 물론 모든 교회와 지도자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지도층의 위치에 있는 교회와 목사들의 행태가 심상치 않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를 이끌어 왔던 대형교회들은 대부분 세습에 성공했으며, 편법으로 교회나 재산을 탈취하거나 거액을 횡령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은 사회적인 문제이기 이전에 하나님 앞에서 심판받아야 될 일이며, 기독교 자체가 각성해야 될 문제이다.
한국교회의 병폐원인은 교회가 기독교의 본질에서 이탈했으며, 목사에게 종교적인 특권과 신적인 권위를 스스로 부여했고, 권위실행의 방편으로 예배와 전도가 활용당한데 있다. 기독교의 본질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확증하는데 있다. 그런데 성경의 신빙성을 확보하거나 성경해석에 중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신자의 수를 늘리고, 헌금을 확보하며 건물을 짓는데 주력했다. 그 결과 교회는 급성장하게 되었고 목사의 권위는 절대적이되었지만 피해는 고스란히 신자들의 몫이 된 것이다.
한국교회의 성장 뒤에는 십일조란 명분으로 헌금을 강요하고, 신의 권위를 남용한 목사가 성도들의 영혼을 유린했으며, 하나님의 명령과 상급으로 헌신을 요구한 어두운 이면이 있다. 종교적인 신드롬은 이념의 이데올로기보다 강력하다. 공산주의 사회에서 종교를 말살하려는 의도도 여기에 있다. 종교에 중독되면 진실을 왜곡하고 편협한 사고에 고착된다. 어쩌면 한국교회가 변형된 기독교로 전락하지는 않을까하는 두려움이 앞선다. 한국교회는 근래 30-40년 동안 물량주의와 기복주의 그리고 의식주의에 만연되었고, 이것을 마치 기독교의 원형으로 받아들인다.
목사가 범법행위로 구속되어도 교회가 핍박당하는 것으로 간주하며, 목사가 세습을 해도 그것이 왜 문제가 되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지혜가 없다. 심지어 성경을 빙자해서 재산을 빼앗기고 노동력을 착취당해도 저항하거나 비판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이정도면 기형적인 신앙이며 종교적인 마력에 묶여버린 상태로 진단된다. 이러한 모든 책임은 종교지도자에게 있다. 다수의 목사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대리자를 자처하며, 신적권위에 의한 집례의식을 통해서 지배구도를 정당화했다.
인간은 제도와 의식 그리고 규범에 취약하다. 이러한 법도는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기 위한 사슬이며, 강자의 이익을 정당화하기 위한 장치이다. 한국교회는 소수를 위한 지배 구조적인 제도와 의식을 탈피하고, 모든 성도들의 은사를 공평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자원해서 실행할 수 있는 성경적인 체제개혁을 시도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개인의 이익을 앞세우기 보다는 교회를 위해서 모든 기득권을 포기해야 한다.
교회는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 악용되는 곳이 아니라 진리의 전당이다. 교회의 진위는 교세가 확장되고, 수입이 증가하며, 건물의 규모가 확대되는 외형적인 성장에 따라서 판가름되는 것이 아니다. 초대교회도 초기에는 확장일로에 있었지만 나중에는 소규모로 전환되었다. 기독교 진리는 외형이 확대되면 부패하고, 현실의 안녕에 안주하면 몰락함을 교회사가 증거하고 있다. 목회자는 진리보다는 교인급증과 교회건축에 집중하고 있거나, 이미 목표를 달성한 교회는 재산은닉과 사유화에 골몰하고 있으며, 성도들은 성경공부보다는 성공의 비결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이 한국 교회의 현주소이다.
이러한 상황속에서도 죽음을 불사하고 사지(死地)로 뛰어드는 선교사들이 있고, 어떤 유혹과 회유 속에서도 끝까지 진리만을 고수하기 위해 진력하는 교회들이 있다. 진리의 길은 화려하거나 결코 세속적인 성공의 발판이 아니다. 다수가 인정하고 수납할 수 있는 보편적인 내용도 아니며 개인의 영달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 오직 진리 그 자체만을 위해서 모든 것을 감내하며 전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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