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인 보호와 여호와의 섭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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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고귀한 단어 가운데 하나인 모정(母情) 앞에 숙연했던 사진의 제목은 ‘충분하지 못한 시간’이었다. 수년을 암과 투병한 엘리자베스 조이스에게 기적처럼 찾아든 임신의 기쁨은 잠시, 완치로 알았던 암은 재발했고 항암 치료를 위해선 임신중절을 받아야 하는 절박한 갈림길이 닥친다. 태어날 생명을 위해 그녀는 그 어떤 치료도 거부했고, 고통의 매일 후 인공분만으로 건강히 빛을 본 릴리와 누린 엄마의 한 달 보름은 하루하루 소중한 행복이었다. 모녀가 함께한 사진을 인터넷에 올렸던, 딸을 위해 기꺼이 죽음을 택한 아내를 바라볼 수밖에 없던 묵묵한 아빠의 아픔은 갓 낳은 아들을 베노니(내 슬픔의 아들)라 부르며 죽어간 라헬 곁 야곱의 비통과 유사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을 며칠로 여기리만치 사랑했던 반려자의 마지막 핏줄을 향한 그의 지극한 애정은 창세기 곳곳에 잘 드러난다.
막내 베냐민을 위해 담보가 되리라 나선(창 43:9) 형은 유다였다. 베냐민의 후손은 ‘물어뜯는 이리(창 49:27)’라 했던 야곱의 예언처럼 싸움에 능한 자들이 많았으니 사사기 20장의 골육상쟁에서 나머지 지파의 사십만과 부딪쳤던 사실을 떠올릴 수 있다. 왕이 없던 혼돈의 시절 한 지파가 멸절 직전에 이르렀던 비극 중에 베냐민 지파와 가장 먼저 맞섰던 유다 지파는 이후 묘한 애증 관계를 이루니, 베냐민 출신의 사울을 이어 유다 출신이 왕위에 오르며 형성된 껄끄러움이 다윗의 므비보셋을 향한 호의 등으로 누그러져 열 지파가 북이스라엘로 향할 때 베냐민만이 유다 곁에 남았던 것이다. 여호와의 곁, 곧 예루살렘 성전 근처에 거하게 하시리라는(신 33:12) 언약대로 다윗 왕가에 머무르게 된 베냐민의 계통에서 유다를 구원토록 하신 모르드개와 에스더가 출현하게 된다.
성전과 성곽이 회복된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잇는 마지막 역사서 에스더서는 상당수 초대 교부들로부터 정경성을 의심받았다. 루터 또한 하나님의 이름이 한 번도 언급되지 않는 데다 기도나 찬양이란 말이 직접 등장하지 않으며 유대교적, 이교도적 색채가 짙은 에스더서가 정경에서 제외되기를 바랐다. 진보주의자들은 아하수에로(크세르크세스 Ι. 주전 485~465)의 왕후 와스디나 에스더가 일반 기록에 없음을 지적하며 유대인들의 단결 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역사 소설로 에스더서를 격하시킨다. 그러나 글자마다 하나님의 숨결이 배어 있는(God-breathed) 성경 전체의 구조는 정경 66권의 결정권이 인간의 판단이 아닌 주권자의 섭리에 있음을 강력히 선포한다.
헤로도투스는 크세르크세스가 마라톤 전투에서 대패한 부친 다리우스를 위해 그리스로 침공한 숫자를 2,617,610명으로 적고 있으나 현대 학자들은 대략 20만 내외로 추산한다. 왕의 친위대인 불사대(不死隊. Immortals)가 기괴히 왜곡되어 등장하는 논란의 영화 ‘300’은 페르시아의 엄청난 군세에 맞선 스파르타 삼백 결사대의 테르모필레 전투를 그렸는데, 480년 살라미스 해전 등의 실패 이후 돌아온 아하수에로에게 478년경 왕후로 간택된 에스더는 큰 위안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말렉 후손 하만의 유다인 진멸 음모로부터 보호케 하신 도구를 유다의 비호 아래 있던 베냐민 출신으로 택하심은 창세기에서 에스더까지를 관통하는 ‘섭리를 통한 언약’의 관점 아래 심오한 의미를 가질 것이다.
그리스도의 최종적 승리를 예표하는 모르드개의 영광 당시, 페르시아 내에서 유다인 되는 자가 많았음은(에 8:17) 유다인의 개념이 이방을 향해 영적으로 확산되는 서막이었다. 구약의 모형적 역사가 신약의 실체적 역사로 선명해지는 가운데 이방을 위한 사도로 부름 받은 베냐민 지파의 바울은 유다 백성의 기준이란 표면의 율법적 조문이 아닌 내면의 신령한 복음에 있음을(롬 2:28~29) 단언한다. 그리스도의 극렬한 반대자를 복음의 거대한 증인으로 세우신 섭리, 철없던 막내 지파를 이스라엘의 극적인 구원자로 세우신 섭리, 하나님 자리에서 판단하려 드는 원초적 죄인을 치밀히 예비된 삶의 굴곡을 거쳐 온전케 세우시는 섭리를 성경은 은혜라 명명한다. 유다인 최후의 날을 제비뽑던 대적의 술수를 그대로 되받아 오십 자 장대로 심판해 그 살아계심을 부림절로 기억케 하셨던 전능자의 세심한 손길은 성도를 비진리와 투쟁하도록 고무하는 죽음보다 강한 사랑의 힘으로 오늘도 살아 역사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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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이재규(자유기고가) |
캄보디아를 다녀와서 (3) |
기독교 신앙의 원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