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무슬림들에 대한 접근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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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라는데 접촉점이”
선교/전도는 문화적 경계 혹은 장벽을 넘어가는 것이다. 복음 전파자와 수용자 간의 간격에 따라 E0, E1, E2, E3, 네 가지로 나누고 있다. 기독교와 이슬람 그 둘이 가지고 있는 역사인식으로 인해 그 문화적 간격(cultural distance)은 크다. 필자는 그 간격이 크기 때문에 ‘E4’라고 주장한다. 그 간격을 넘기 위해 이슬람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한 시점이다. 필자는 “이슬람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있는가?” 질문을 던지고 있다.
모 이슬람 선교단체에서 나온 이슬람 소개 책자의 표지에는 9.11 테러 당시 쌍둥이 빌딩에 충돌하는 그림이 실려 있다. 무슬림을 대상으로 선교를 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모든 무슬림들은 테러리스트로 규정하고 타도하려는 것인지가 분명하지 않다. 이슬람 신자인 무슬림을 선교하려면 그들의 문화를 이해해야 한다. 여기서 문화란 인류학적인 의미로 ‘인간 삶의 모든 총체적인 것을 포함하는 것’이다.
보수적인 중동지역
이슬람이 태동한 중동지역에서의 삶은 생태적 환경으로 인해 완고하고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고대 아랍의 시인 산파라가 쓴 전기에 그들의 보수적인 특성을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어느 날 사막을 지나가던 산파라는 그 지역에 사는 바누족 사람들과 마주친다. 그들은 산파라의 앞을 가로막고 산파라에게 수모를 준다. 모욕을 당한 산파라는 바누족 전체를 대상으로 복수하리라 마음먹고 100명을 죽이기로 다짐한다. 다음날부터 활과 화살을 들고 바누족 사냥에 나서 15년 동안 99명을 죽인다. 마지막 한명을 남겨놓은 어느 날 그는 우물가에서 이름 모를 악당들의 공격을 받고 죽고 만다. 그의 시체는 사막의 짐승들이 먹어 버렸고 뼈만이 우물 주위에 흩어져 있었다. 그 후 바누족 몇 사람이 우물에서 물을 마시려는데 갑자기 모래 바람이 물어와 산파라의 뼈가 날리더니 바누족 사람의 머리에 맞아 결국 죽게 된다. 이처럼 산파라는 죽은 후에도 자신의 맹세를 잊지 않고 바누족 100명을 채운 것이다.
보복의 문화는 중동 지역 뿐 아니라 세계 모든 곳에 존재하고 있다. 산파라의 이야기는 전설에 불과하지만 중동지역의 아랍인에 대한 완고함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샘물교회 사건, 예맨에서의 폭탄테러 등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보복은 한국의 미국의 파트너로 보는데서 기인한다. 1980년대부터 시작된 중동지역에서의 전쟁으로 인해 피패된 그들에게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해서 다 통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각이다. 복음을 전하는 우리의 생각을 버리고 그들의 입장을 고려해야 한다.
다양한 스펙트럼의 이슬람
최근 몇 년 동안 이슬람 관련 포럼이 유행처럼 지나갔다. 그 포럼들에서 언급된 몇 마디의 말들을 살펴보면 우리가 가진 이슬람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단편적인 가를 알 수 있다. 두바이를 한번 방문하고 온 지자체 장은 “모든 무슬림들은 하루에 다섯 번 기도한다.”고 하였다. 한 자매는 “무슬림을 만나 ‘오늘 죽으면 천국 갈 자신이 있는가?’ 물어보았더니 대답을 못하더라. 그들은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다.”고 하였다. 무슬림은 모드 하루에 다섯 번 기도하고, 또 천국에 대한 확신은 없는 것일까? 이슬람 국가 한번 방문하고, 무슬림 한번 만나보고 그들을 이해 할 수 없는 것이다.
아프리카 모로코에서부터 필리핀 남부까지, 그리고 유럽, 미국, 호주까지 대략 14억의 무슬림이 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이 하나의 스펙트럼을 가지지 않고 다양한 거처럼 그들도 그렇다. 보수적이고 근본주의적 경향을 보이는가 하면 자유주의적 신앙도 있다. 과격한 부류가 있는가하면 온건한 부류도 있다. 필자가 인류학자로서 현지조사(field work)를 통해서 발견한 것은 모두가 다섯 번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과, 그들도 천국에 대한 확신과 더불어 하나님에 대한 헌신이 대단하다는 것이다. 필리핀에서 만난 무슬림이 있다. 그는 헌신된 무슬림으로 하루에 다섯 번 기도한다. 그런데 주변의 무슬림 친구들은 그의 삶의 스타일은 크리스천이라고 한다. 물론 나는 그의 할아버지가 20세기 초 중국에서 필리핀 무슬림 지역으로 오면서 생존 전략으로 개종했을 것이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바로 여기에서 이슬람 선교의 접촉점을 찾아가야 한다.
인간이라는데 접촉점
모든 종교의 교리가 동일하지 않은 것처럼 이슬람과 기독교는 당연히 교리가 다르다. 선교와 관련되어 중요한 점은 이슬람은 정치와 종교가 분리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라.” 아니면 “선교의 자유를 보장하라.” 이야기하는 것은 어불 성설이다. 오히려 이슬람권에서 살아가는 인간들도 우리와 동일한 인간 이라는데 주목해야한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젯다를 출발하여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로 운항하는 비행기 노선이 있다. 젯다를 출발한 비행기는 2시간 반 정도 시간이 지나야 사우디아라비아의 영공을 벗어날 수 있다. 영공을 벗어나면 여인들은 차도르를 벗으며, 와인 서비스도 시작된다. 쿠알라룸푸르에서 젯다로 돌아갈 때는 역순이다. 이것은 무엇을 예기하는 것인가? 우리들 인간인 것처럼 그들도 동일한 인간이며, 동시에 우리 사회에 있는 일들 그들에게서도 동일하게 일어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동성연애, 혼전 임신, 이혼과 재혼, 살인 등이다. 그러므로 그들도 인간이라는 데서 접촉점을 찾아야 한다. 종교적 틀 속에 갇혀서 옴짝달싹 못하는 그럴 사람들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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