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의미
고난의 의미
**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왜 고난을 주시는가?
욥 42:1-5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여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서언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될 때 항상 자기의 죄책에 따른 징계의 결과로 간주하여 자책하거나 두려움에 사로잡혀 더욱 힘든 생활을 하게된다. 뿐만 아니라 신앙생활을 잘못한 결과로 인해 어려움이 주어 졌다고 판단하여 수치를 느끼며 감추고 싶어한다. 그러나 욥기서는 성도에게 까닭 없이도 고난이 주어질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으며 고난 자체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밝혀주고 있다.
욥은 동방의 의인이었다고 1장에서 말하고 있다. 그는 때마다 온 식구들이 모여 하나님을 경배하며 제사를 드리는 경건한 가장이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재산을 잃게되고, 자식들이 몰사하며, 자신은 병이 들고, 아내의 저주와 수모를 당한다. 이것은 일반 사람들이 상상하기도 싫은 엄청난 재앙이다. 이 문제를 놓고 친구들은 말이 많다. 왜 아무 까닭도 없이 욥에게 이런 일이 발생했겠는가? 친구들 모두의 결론은 욥이 하나님 앞에 잘못한 것이 있기 때문에 재앙이 주어진 것이므로 회개를 해야한다고 촉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욥의 소신은 결단코 자신이 하나님 앞에 잘못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들의 갈등이 있는 것이다. 친구들의 말이 옳다면 욥은 회개만 하면 간단한 것인데… 욥이 끝까지 소신을 굽히지 않고 있다. 왜 그런 것일까? 욥이 교만해서일까? 만약 욥의 주장대로라면 잘못이 없는데 왜 그런 가혹한 재앙을 당하게 된 것일까?
이러한 문제들을 정리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고난의 성격을 바르게 정립하고 의미를 파악해야 할 것이다.
1. 고난은 원인 없이도 주어진다.
“욥 2:3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격동하여 까닭 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오히려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켰느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과론(因果論)적 사고에 의해서 모든 고난은 인간이 어떤 잘못을 했기 때문에 그 결과로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욥의 친구들도 집요하게 욥에게서 재앙의 원인을 찾으려고 추궁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성경은 인간의 행위와 관계 없이도 불같은 시련이 주어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항은 인간이 죄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와 무관하게도 재앙은 얼마든지 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친구들의 주장과 욥의 답변이 충돌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 문제가 정리되어야 신앙 생활을 잘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어려운 일들이 주어져도 당황하지 않게 되고 욥과 같이 당당하게 대처할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은 사례들은 욥 뿐만 아니라 성경을 통해서 다양하게 증거되고 있다. 먼저 이스라엘 민족은 아무런 까닭 없이 사 백년 동안 종살이를 하게 되었고, 다윗은 믿음으로 골리앗과 싸워 승리했지만 그 결과 3차례의 시련을 겪게 되었으며, 바울도 일평생 주를 위해 선한 싸움을 싸우며 살았지만 그의 삶은 너무나 힘들고 처절했었다. 이처럼 인간의 선행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에게 고난은 필수적인 과정인양 근접해 있음을 볼 수 있다. 도리어 악인들은 이 땅에서 형통하지만 성도들은 오히려 고난을 많이 겪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만 보더라도 고난이란 인간의 행위와 무관하게 주어진다는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 무조건 하나님의 저주로 단정하든지, 채찍으로 이해하는 것은 모순된 것이라 생각된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잘 하는 사람들에게도 얼마든지 어려움은 주어 질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시 73:1-5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2. 고난은 언약 백성의 특권이다.
고난이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사랑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복을 주시며 언약을 세우신 하나님께서 곧바로 흉년을 통해 애굽으로 내려가게 하시더니 애굽에서 환란을 당하게 하신다. 이스라엘 민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실 때 한달 이면 충분히 갈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40년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다. 그 이유는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데 왜 어려움을 주시는가? 그것은 어려움을 통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랑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불치의 질병을 주셨다. 그래서 바울은 병 낫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나 그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질병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옳은 말씀이다. 질병, 가난, 실패의 고난 때문에 교만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일 것이다. 그래서 욥은 자신의 고난을 믿음의 단련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욥 23:10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고난이란 아무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에게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게 하는 아름다운 것임에 분명하다.
“벧전 2:19-20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3. 고난은 저주가 아닌 축복이다.
고난의 성격을 좀더 자세히 구분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형벌과 저주는 불신자에게 주어지는 것으로서 최종적인 심판의 성격을 갖고 있다. 반면에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고난은 징계와 시련으로 구분 할 수 있는데, 징계는 히브리서 기자의 말처럼 --히 12:5-6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사랑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반성과 돌이킴을 유발하는 하나님 사랑의 채찍질이며 사랑의 표현인 것이다. 반면에 욥기에 나타난 시련은 범죄하는 성도들을 돌이키게 하는 징계와는 달리 성실한 성도들에게 믿음의 성숙을 위한 방편으로서 주어지는 것을 말한다. --벧전 4:12-14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이와 같이 까닭 없이 주어지는 애매한 고난이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저주나 징계가 아니라 엄밀히 말하자면 믿음을 성숙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축복인 것을 알 수 있다. 보통 사람들은 축복의 개념을 이 세상에서 성공하여 잘 먹고 잘 살며 하는 일 마다 잘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진정한 축복은 신령한 것을 말하는 것으로서 하나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고 그 분을 의지하며 찬송하며 살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어떠한 형편에 처하더라도 자족의 비결을 터득해서 범사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며 기뻐하는 삶 살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성도의 약함과 가난과 고난은 수치가 아니라 도리어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되는 아름다운 자랑거리이다. 혹자들은 신앙생활 오래하고 가난하거나 질병에 들면 저주요 수치라고 막말을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수치요 선배들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도 머리 둘 곳도 없이 사셨고, 그의 제자들 대부분도 이 땅위에서 너무 참혹한 생활을 했으며 중세시대의 성도들 역시 카타콤과 말할 수 핍박 속에서 살다가 순교한 자들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과연 그들의 생애가 저주받은 것이란 말인가? 성도의 행복은 주어진 여건 속에서 범사에 감사하며 평안을 누리는데 있습니다. 욕심을 채우기 급급한 인생이야말로 불행한 것입니다. 진정한 축복은 성공이 아니라 자족의 비결을 터득하고 살아가는데 있습니다. --딤전 6:8-10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4. 고난은 하나님을 깨닫게 한다
고난이란 욥의 고백대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눈으로 밝히 보게 하는 결과를 주었다. 욥은 자신에게 주어졌던 재산, 자식, 아내, 건강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주어지기도 하고 하나님 마음대로 가져가시기도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련이 주어지기 전에는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여건과 상황이 당연한 줄로 여기거나 아니면 자기의 노력과 능력에 의해서 되어진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불신앙적 태도이며 죄악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말씀하신다. --신8:11-20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성도에게 있어서 시련이란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능력을 확인하게 하는 방편이다. --삼상 2:6-7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능력의 표현이 바로 시련을 통해서 보여 지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곤고함과 형통함을 겸하여 주시며 섭리하시는 것이다. 고난은 인간을 순수하게 만들며 의지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확실하게 알려준다. 고난은 인간의 무능력을 알게 하며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확실하게 중거해 준다.
맺는 말
이상과 같이
고난이란 까닭 없이 무조건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고난이란 특히 사랑하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다.
고난이란 특별은총으로 주신 신령한 축복인 것이다.
고난이란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는 방편인 것이다.
고난이란 성도들의 신앙을 양육하는 수단인 것이다.
고난을 많이 겪은 성도들은 하나님을 찬송할 내용이 풍부해 진다.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란 말처럼 성도의 고난은 영광스런 훈장이요 기쁨의 초석이 될 것이다.
벧전 1: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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