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의 이유
찬송의 이유
들어가는 말
첫 번째,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3절)
두 번째, 기업을 잇기 때문이다. (4절)
세 번째, 보호를 받기 때문이다. (5-6)
네 번째, 영광을 얻기 때문이다. (7절)
맺는 말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벧전 1:3~7)
들어가는 말
베드로는 여러 아시아 지역에 흩어져 나그네와 같이 정처 없는 생활에 지쳐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오히려 찬송을 촉구하고 있다. 이러한 베드로의 주장이 참으로 역설적인 것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재의 삶에 대한 궁핍과 학대 그리고 어떤 문제에 직면했을 때 그 문제 자체의 해결만을 절실히 원하게 된다. 하지만 베드로는 현실의 어려움을 찬송으로 승화시키면서 왜 그렇게 되는지에 대한 해결책을 다음과 같이 제시해 주고 있다.
성도생활의 기초는 찬송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특권은 어떠한 형편과 처지에서도 합력 해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의미를 알기 때문에 언제나 찬송이 가능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권리인 것이다.
성도의 생활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늘 찬송하며 사는데 있다. 찬송이란 단순한 노래가 아니다. 곡조와 장단에 맞추어 소리를 낸다고 해서 찬송을 부르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찬송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그 은혜에 감격하는 심령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라고 말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면 진정한 찬송을 부를 수 없으며, 이것은 성도로서 기본적 자세가 갖추어져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찬송이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깨달음으로부터 시작되며, 이 깨달음은 성도들의 정서(情緖)를 평강이 지배함으로서 늘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의 생활은 곧 찬송이며 범사에 감사하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성도들로 하여금 범사에 감사와 찬송을 하게 하는가? 이에 대해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첫 번째,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3절)
소망이란 ‘확신’ 또는 ‘기대’를 의미한다. 이 말은 확실히 믿을만한 사건이나 약속이 있음을 전제하는 것이다. 베드로는 이 소망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라고 증거하고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있다. ‘부활’은 베드로가 직접 경험한 사건이었으며, 많은 사람들도 직접 본 바요 만진바 있는 확정적 사건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부활’은 그리스도 자신의 사건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백성들 모두에게 ‘영생(永生)’에 대한 표적으로서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부활’의 약속이 ‘산 소망’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구약의 수 천년 역사를 통해서 예언된 것이며, 그 예언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실재로 성취된 사건이기 때문이고, 제자들이 실재로 경험한 것이기에 확실히 믿을 수 있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소망의 확실성을 더하기 위해서 ‘산 소망’이란 표현을 하고 있다. ‘산’이란 ‘a lively’로서 ‘살아있는’ 또는 ‘생기 있는’이라는 뜻이다. 즉, 부활의 약속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파기될 수 없으며, 생명력이 있는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바울도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금생(今生)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라고 증언하고 있다.
인간에게 가장 절실한 소원은 죽지 않고 오래 사는데 있다. 비록 순간에 불과한 이 세상의 삶에 고달픔이 있다할 찌라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부활의 생명’이 보장되어 있는 미래가 있기 때문에 좌절하지 않고 소망 가운데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나고 중생한 하나님의 백성들만이 믿어질 수 있는 특권이다. 미래에 대한 약속이 믿어짐으로서 소유하게되는 기대감과 희망은 그 어떤 열악한 환경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되며 찬송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사례를 성경에서 찾아보면,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구원의 소망을 간직한 노아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미래에 있을 홍수 심판에 대해서 불신하며 향락에 취하여 살 때 혼자 묵묵히 방주를 제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확정된 하나님의 약속이 믿어졌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약속이 믿어진다는 것은 축복이며 작정된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은혜의 선물이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부활의 약속에 대한 확신도 불행 가운데서 희망을 갖게 하며, 고난 가운데서 기쁨을 유지하게 한다. 이것이 고난과 시련 가운데서도 늘 찬송하게 하는 이유인 것이다.
두 번째, 기업을 잇기 때문이다. (4절)
베드로는 부활에 대한 약속을 통하여 영생의 소망을 갖게 됨으로서 찬송하며 살게될 것을 권고했다. 그리고 생명에 대한 약속뿐만 아니라 장차 받게될 기업에 대한 약속도 상기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기업’이란 ‘상속권’ 또는 ‘세습재산’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받게 될 유업을 말한다. 그리고 이 유업의 성질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즉 썩지 않는 것은 존재의 연속적인 관점에서 ‘멸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며, 더럽지 않는 것은 상징적으로 ‘순수한’ 것을 뜻하고, 쇠하지 않는 것은 ‘시들지 않고 영원한’ 것을 말한다.
이 말을 종합해 보면, 성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게될 기업은 영광된 것이며 영원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바울 역시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 언급하고 있다. 즉 성도의 기업은 부활의 영생을 뜻하며 이것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영광된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주를 위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살게 된 계기도 여기에 있었다. 베드로 역시 예수의 부활을 경험하기 이전에는 영웅심으로 행동했지만, 그의 그런 행동은 그리스도의 죽음 앞에서 여지없이 허물어 졌으며 모든 다짐을 뒤로하고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하지만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부터는 확신에 찬 논조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탄 없이 증거하게 되었고, 급기야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순교자의 반열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처럼 부활에 대한 확신 즉, 미래에 대한 생명과 기업의 보장은 인간의 가치관을 완전히 탈바꿈하게 하며 육신적인 삶 자체를 초월하며 살아가게 하는 초인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현대인들이 왜 불안해하고 우을증에 시달리는가? 이유는 미래가 불안하기 때문이다. 보장된 미래가 없다는 것은 그만큼 현재의 삶에 대해 불안감을 야기 시킬 뿐만 아니라 그 어느 것으로도 안정감을 찾을 수 없게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증거로서, 전도서 기자(記者)인 솔로몬도 확정적인 미래의 약속을 기대하며 소망하는 삶을 살지 못하고, 현세의 헛된 것으로 안정감을 찾기 위해서 세속적인 쾌락에 도취되어 일평생을 허비하였다고 진술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해 아래의 모든 것은 헛된 것이며, 인간을 행복하게 할 수 없다고 역설하는 것이다. 오직 영원하신 하나님을 경외하는데서 인간의 행복이 시작되며 현실의 의미와 가치가 부여된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렇다 영원한 미래가 없는 인간은 한 순간도 불안과 초조함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러나 확실한 미래가 보장된 사람은 현재의 어떤 고난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바울은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 증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환란 가운데서도 찬송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보장해 주신 기업의 성질이 영광된 것이며 영원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세 번째, 보호를 받기 때문이다. (5-6절)
베드로는 어떻게 보면 망막(茫漠)하리 만큼 힘들어하고 있는 성도들을 향하여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라는 말로 위로하고 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의 삶이 끝날 때까지 하나님의 능력으로 둘러싸여 있게 될 것임을 뜻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좌절하고 낙심하기보다는 오히려 찬송하며 사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찬송이란 시련의 과정 없이 표현되지 않는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고 찬송하게된 경위도 철저한 시련을 통해서이다. 그들은 애굽의 학대 아래서 사백 년 동안이나 고초를 겪으며 살아왔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지도자 모세를 세우시고 그를 통해서 바로 왕에게 도전하게 하신다. 급기야 바로 왕과 신경전을 벌이게 되며, 이를 계기로 하나님께서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신다. 이에 대해 바로 왕과 애굽 백성들은 극도로 흥분되어 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이려 하기에 이른다. 그때 하나님은 최고조에 다다른 위기상황을 연출하시어 앞에는 홍해바다를, 뒤에는 살기 등등한 애굽의 군대를 포진시켜 이스라엘 백성들을 극도의 혼란과 두려움에 휩싸이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이런 절박한 상황을 연출하신 다음 홍해 바다를 갈라 길을 내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신다. 그 결과 이스라엘 민족이 최초로 여호와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에 대한 찬송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절실히 느낄 수 있는 환경은 절박할 수록 찬송의 강도(强度) 또한 정비례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애굽으로 내려보내어서 바로 왕에게 수난을 당하게 하신다. 야곱도 역시 아비 이삭과 형 에서를 속이고 이십 년 동안 시련의 세월을 경험하게 하신다. 모세 또한 살인자가 되어 사십 년 미디안 광야 생활을 경험하게 하신다. 다윗도 왕이 되기까지 세 차례의 혹독한 시험을 겪게 하신다. 유대 백성들도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칠십 년 동안 만신창이가 되게 하신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도 십자가의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극도의 시련을 겪게 하신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섭리 의도는 하나님의 백성을 혹독하게 몰아세우려는데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곤고한 다음에 형통함을 주셨다. 특히 그리스도에게는 죽음에서 부활하게 하시는 가장 극적인 상황을 연출시키셨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다는 사실을 확증시켜 주심으로서 그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에 있는 것이다.
찬송은 값진 것이며, 찬송을 부를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 아름다운 삶의 의미를 알게 하시려고 시련을 주신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베드로 역시 불같은 시련을 겪고 있는 성도들을 향하여 기쁨으로 찬송할 것을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네 번째, 영광을 얻기 때문이다. (7절)
베드로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라는 연단의 결과를 통해서 찬송의 당위성을 확고히 하고 있다.
인간의 삶 또는 생명은 현세적인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영원한 생명사상의 중요성은 현세의 가치판단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만약 인간의 생명이 영원하지 못하고 현세에 국한된 유한(有限)한 것이라면, 누구든지 현세적인 삶 자체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게 되고, 반드시 현세에서 모든 것이 평가되어져야 한다고 여길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현세에서 겪고 있는 시련의 의미와 가치 그리고 존재 자체가 무의미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는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는 말로서 현세의 삶의 기간이 순간에 불과하며 장차 심판이 있을 것을 예고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베드로의 증거가 매우 의미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베드로는 시련의 결과를 ‘칭찬’과 ‘영광’ 그리고 ‘존귀’로 요약하여 말하고 있다. 이 말을 정리해 보면, 믿음의 시련은 첫째,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내용을 알게 하고, 둘째, 거룩하신 하나님을 생각하고 찬양하게 하며, 셋째, 시련을 경험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장 존귀(尊貴)히 평가받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시련이 가져다 주는 이러한 결과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은 즐거워하며, 찬송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평가란 대단히 중요한 의의가 있는 것이다. 인간은 어쩌면 평가받기 위해서 산다고도 볼 수 있다. 인간은 사람들의 평가 때문에 좌절하기도 하고 자만하기도 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내리는 상대적 평가보다도 하나님께서 판정하시는 절대적 평가에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평가가 번복할 수 없는 것이며, 그 효능이 영원한 것이고, 그에 따른 상벌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베드로 바로 이 점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의 권속들이 이 세상에서 받는 평가는 무의미한 것이며, 진정한 평가는 그리스도의 심판 때에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믿음의 시련을 경험한 성도들은 비록 세상에서는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다 할 찌라도 최종적으론 ‘존귀한 자’로 평가받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성도들에게는 진정한 희망이요 찬송의 이유가 된다는 것이다.
시련의 결과에 대해서는 구약의 욥기도 증거하고 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욥의 시련은 너무 가혹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친구들도 복잡한 생각을 하게되고 욥에게 인과응보(因果應報) 사상이 암시하는 데로 회개를 촉구하기도 한다. 그러나 시련에 대한 해답은 욥이 하나님의 전능성을 고백하고, 그동안 깨닫지 못하던 하나님의 영광을 눈으로 본다는 것으로 결론 맺게 된다. 찬양이란 여호와의 영광을 볼 수 있는 자 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시련을 통해서만이 여호와의 전능성, 신실성, 주권성, 영원성, 자비성의 영광을 노래할 수 있는 것이다.
맺는 말
찬송이란 축복과 감사와 그리고 경외와 연결된 종합적인 의미를 지닌다 할 수 있다. 찬송의 동기는 하나님께서 신령한 복을 주신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직후에 복을 허락하셨다. 노아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음으로, 아브라함도 하나님께서 복을 주심으로서, 다윗도 하나님이 예선하여 지명하고 축복해 주심으로 그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찬송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축복으로 시작하여 그 복을 깨달은 백성들이 그 은혜에 감사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감사함은 감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배하게 되는 종교적 행위로 마무리하게 된다. 즉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축복을 깨달아 감사하며 그 은혜의 영광을 기리기 위해서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게 된다는 것이다. 찬송이란 하나님을 향한 성도들로 이루어지는 종합예술이며 아름다움의 극치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찬송은 반드시 시련을 통해서 그 의미가 깊어짐을 알 수 있었다. 인간의 인식 기능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좋고 나쁜 것을 그 자체만으론 인식할 수 가 없게 되어 있다. 즉, 빛과 어둠, 가난과 부요, 질병과 건강, 곤고와 형통이라는 서로 상반되고 대비적인 방식을 통해서 사물과 언어의 개념을 인지할 수 있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찬송 역시 복을 가치롭게 인식할 수 있고, 하나님의 능력을 확인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시련의 방식을 통해서 섭리되어 지게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련과 찬송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동전의 양면과 같이 언제나 하나의 용도와 의미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형성된 찬송의 열매는 찬송을 받으시는 하나님 보다 찬송을 하게되는 당사자에게 큰 행복이 된다. 인간의 불행은 존경할 대상이 없는데서 비롯된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종교성이 있기 때문에 누군가를 의지하고 기리며 경외하는데서 안정감을 찾고 행복을 느끼게 되는데, 그 대상을 찾지 못하고 종교행위를 하지 못할 때 초조감은 증가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인의 정신적 질병의 원인도 찬송을 못하고 살아가는 데 있다고 볼 수 있다. 마음으로 찬송할 수 있다는 것은 마음이 평안하고, 범사에 자족하며 감사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성도들이 마음으로 부르는 찬송의 진가(眞價)는 성도 생활의 기초이며 행복의 척도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무엇 때문에 고난 가운데서도 찬송하게 되는지 그 이유를 살펴보았다. 그래서 당당히 말할 수 있다. 찬송은 하나님의 은총의 결과이며, 하나님의 백성들만이 누릴 수 있는 절대 행복이라고…
“여호와께 감사하며 그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 행사를 만민 중에 알게 할지어다. 그에게 노래하며 그를 찬양하며 그의 모든 기사를 말할지어다. 그 성호를 자랑하라 무릇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마음이 즐거울지로다.”
(시1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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