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 히브리서 11:1~2 -
Ⅰ. 이끄는 말
기독교에 대한 진리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아주 흔하게 사용되는 용어 중의 하나가 ‘믿음’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기독교적인 행위를 총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용어가 바로 ‘믿음’이며, 기독교에서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강조하는 것도 또한 ‘믿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 있어서나 건전한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믿음’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성경적으로 규명해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진리를 전달하는 데 있어서, 전달하는 자나 전달을 받는 자가 사용하는 용어의 의미를 정확하게 같이 이해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용어를 전달하는 자와 전달을 받는 자가 서로 다른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면 정확한 진리의 내용 전달이 불가능해질 뿐만 아니라 같은 내용을 서로가 다르게 이해하고 견해를 달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독교 진리를 전하는 데 있어서 의미상으로 비중이 큰 믿음이라는 용어에 대한 바른 이해는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전해진지 100여 년이 지난 오늘의 한국 교회는 외형적으로 천만이 넘는 신자의 수를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문제는 신자들의 믿음이 모두가 동일한가라는 질문에는 선뜻 긍정적인 대답을 하기가 주저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국 교회는 근본을 달리하는 구교를 제외하고 개신교 안에서만도 명칭을 달리하는 교단이 수십개나 되고, 명칭은 같이 사용하면서도 교단을 달리하는 경우는 그 수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더 많은 분파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이들 교단들이 더러는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으나 더러는 믿음을 달리하는 경우도 있다. 그 원인은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가 있겠으나 그 중에 아주 중요한 것은 ‘믿음’에 대한 견해를 달리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매우 놀라운 사실은, 같은 교단은 물론, 같은 교회에 다니는 신자들 사이에도 믿음에 대한 견해를 각기 달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모두가 ‘믿음’에 대한 성경적인 정확한 인식이 충분하지 못한 데서 발생하는 결과이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성경적인 정확한 해답을 찾아 제시함으로 성경적인 기독교 신앙의 일치를 꾀해 보려고 한다.
Ⅱ. 믿음이란 말의 뜻
구약에서 믿음이라는 뜻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히브리어는 ‘에문(?????)’이라는 단어로서 ‘확고함’이라든가 ‘불변’이라는 원래의 뜻에서부터 ‘신뢰’라든가 ‘성실성’이라는 개념으로 사용되는 말이다. 이 외에도 ‘빠타(?????)’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 말은 세속적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고 종교적 의미로도 사용이 되고 있다. 이 단어는 비교적 다양한 의미로 사용이 되기는 하지만, 이 단어의 정확한 실제적인 의미는 성도 자신이 믿고 의지하는 바 하나님께 대한 성도의 신앙적 지각에 대한 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안전함’이라는 뜻과 ‘확신함’ 또는 ‘신임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믿음을 나타내는 히브리어 중에는 ‘하사(?????)’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 단어는 주로 종교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그 뜻은 ‘피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피하다’라는 의미는 성도가 하나님께 자신을 도피시켜 의지한다는 뜻에서 사용되는 말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용어들 외에도 ‘믿음’이라는 개념으로 구약에서 사용되고 있는 히브리어들이 많이 있으나,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헤세드(?????)’라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사용하는 폭이 넓어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베푸시는 ‘자비’라든가, 사람이 하나님께 가지는 ‘경건심(敬虔心)’이나 ‘신앙심’이라든가, 또는 사람들 사이에서 가지게 되는 ‘긍휼’이나 하나님의 언약 아래서의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라는 뜻 등으로 사용이 되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교심을 형성케 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언약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말이다. 그리고 이 단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대한 믿음과 하나님의 그 백성에 대한 신실하심, 곧 미쁘심(faithfulness)을 표현하는 데에는 아주 적합한 용어인 것이다.
신약에서는 ‘믿음’이라는 개념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된 용어들은 거의 대부분 ‘피스티스(πιστι? )’라는 헬라어 어의군에 속하는 용어들이다. 그중에 하나가 ‘피스튜오(πιστευω)’라는 동사인데 ‘믿는다’라는 뜻을 나타낸다. 그리고 ‘피스티스(πιστι? )’라는 헬라어는 하나님을 믿는 인간의 믿음(faith)이라는 의미로 사용이 된다. 또한 ‘피스토스(πιστο? )’라는 헬라어 형용사는 하나님의 지극하신 ‘미쁘심’을 나타내는 경우와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의 ‘신실하심’을 나타내는 경우, 또는 기독교 진리의 미쁘신 상태를 나타내는 경우 등에 사용되는 용어이다.
Ⅲ. 믿음의 속성(屬性)
믿음이란 무엇인가? 라는 주제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그 속성을 먼저 알아 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기독교 안에 믿음의 속성에 대한 오해가 많이 있어서 사이비 기독교 신앙운동이 범람하는 근본 요인이 되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기독교 정화에 기여도가 높은 해결 과제라 할 수 있다.
기독교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몇 가지의 중요한 속성들을 가지고 있는데 그 속성들은 주권성, 은혜성 등으로 정리된다. 이들 속성들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성경에서는 확실하게 밝혀주고 있어서 믿음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 커다란 도움을 주고 있다.
1. 주권성(主權性)이다
기독교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주권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믿음이 인간 의지의 노력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안에 속하여 있다는 뜻을 표현하는 말이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믿음을 자기 스스로의 육체적 욕망에서 나오는 신념과 혼동해서 이해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예를 들면 인간 욕망으로부터 나오는 ‘하면 된다’고 하는 소위 긍정적 사고의 경우가 바로 그 한 예가 되는 것이다. 이같은 경우는 어디까지나 인간 스스로의 욕망을 기초로 한 고집의 산물로서 성경이 말하는 믿음과는 거리가 너무도 먼 것이다.
성경적인 믿음은 인간편에서 믿고 싶으면 믿고, 믿기 싫으면 믿지 않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주관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믿게 하시면 인간편에서는 절대적으로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1장 17절에서 말하기를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라고 하였다. 즉 인간이 스스로 믿음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말이다.
2. 은혜성(恩惠性)이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성경적인 믿음이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은혜의 속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믿음을 주실 때에 인간의 공로나 의를 조건으로 해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쁘신 뜻을 따라 택한 자에게 거저 은혜로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성경적인 믿음은 은혜의 속성을 가지기 마련이다.
바울은 에베소서 2장 8절에서 말하기를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였다. 이 내용은 성도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것이 성도 자신의 공로나 의의 대가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된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모든 자의 것이 아닌 것이다.(살후 3:2 참조)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것도 아브라함 자신의 의지적 결단에 의해 하나님을 믿으려고 노력한 결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을 따라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일방적으로 부르셔서 언약을 세우시고,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믿음을 선물로 주셔서 은혜로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신 것이다.
결론적으로, 성경적인 믿음은 하나님께서 기쁘신 뜻을 따라 택한 백성에게 은혜의 선물로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자기 주관에 의하여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믿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셔서 믿게 하시면 인간은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기독교의 올바른 믿음인 것이다.
Ⅳ. 믿음의 조건(條件)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믿음을 선물로 받을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져 있는 자의 것이 된다. 그런데 이 믿음의 조건은 인간 편에서 갖추어야 할 주관적인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갖추어 주시는 객관적인 조건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믿음을 주셔서 믿게 하시기까지는 몇 가지 갖추어 놓으신 조건이 있으시다. 그것은 성부 하나님의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택과, 성자 하나님의 영원하신 속죄와, 성령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한 중생이다.
1. 성부 하나님의 선택(選擇)
영원히 스스로 계시는 성부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의 아들들이 될 자들을 미리 선택하셨다.(엡 1:4~5 참조) 이것이 곧 믿음의 첫번째 조건이다.
성경적인 믿음은 인간 자신의 의지적 결정에 의한 판단에 따라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에 따라서 은혜의 선물로 거저 주어지는 것인데, 바로 그 믿음을 받을 수 있는 대상이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아들로 미리 선택해 놓으신 자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은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절대로 구원에 이르는 참 믿음을 은혜의 선물로 주시지 아니 하신다.(막 4:10~13 참조)
하나님께서 택자에게 믿음을 주셔서 구원을 얻게 해 주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에 대하여 바울은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9:16)”고 말했다.
2. 성자 하나님의 속죄(贖罪)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 육신이 되어 구속주로서 세상에 오신 성자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의 죄를 영원히 속죄하여 주셨다. 이것이 곧 믿음의 두번째 조건이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은 세상 모든 인간들의 죄를 대속하여 주시려고 죽으신 것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께 미리 선택된 백성들의 죄만을 영원히 대속하여 주시려고 죽으신 것이다.(요10:14~15 참조) 그러므로 성자 하나님의 속죄는 당연히 믿음의 조건이 될 수밖에 없다.
믿음과 속죄와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속죄가 믿음의 조건이지 믿음이 속죄의 조건은 절대로 아니다. 다시 말해서 성자 하나님의 속죄를 받아야 하나님께로부터 믿음을 선물로 받는 것이지, 믿음을 선물로 받아야 속죄를 받는다는 말이 아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속죄는 성도에게 믿음의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속죄도 은혜이며 믿음도 은혜이다.
3. 성령 하나님의 소명(召命)
성부와 성자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으신 성령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선택이 되어 영원한 속죄를 받은 자를 불러 거듭나게 하신다. 이것이 곧 믿음의 세번째 조건이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아무나 불러 거듭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성자 하나님께서 속죄해 주신 자만을 정하신 때에 부르셔서 거듭나게 해 주신다. 그리고 이와 같은 놀라운 복음을 성령 하나님께서 감동하셔서 거듭난 자에게 깨닫게 하심으로 믿음을 가지도록 해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 하나님의 소명, 즉 부르심에 의한 거듭남의 역사는 당연히 믿음의 조건이 되는 것이다.
성령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한 거듭남의 역사는 믿음과 직접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부르심에 의한 거듭남의 역사나 복음을 깨닫게 하여 믿음을 가지도록 하는 역사는 모두가 같은 성령 하나님의 사역인 점에서 관계가 깊다. 그리고 또한 성령의 부르심에 의한 거듭남의 역사가 믿음의 직접적인 조건이 된다는 점에서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성경적인 믿음은 성부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선택하심과 성자 하나님께서 영원한 속죄를 이루심과 성령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거듭나게 하심을 그 조건으로 삼고 있다.
Ⅴ. 믿음의 대상(對象)
일반적인 종교들은 그 믿음의 대상을 각기 달리한다. 어떤 종교에서는 조상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기도 하고, 어떤 종교에서는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우상이나 혹은 피조물들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기도 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일반적인 이방종교들과는 달리 기독교 특유의 분명한 믿음의 대상을 가지고 있다.
성경적인 믿음은 구약에 계시된 하나님 여호와와 신약에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를 그 대상으로 삼는다. 하나님 여호와께서 믿음의 직접적인 대상이시라면, 예수 그리스도는 간접적인 믿음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구약에 계시된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믿게 하시려고 신약에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계시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요14:6~7 참조)
1. 하나님 여호와
성경적인 믿음은 하나님 여호와를 믿음의 직접적인 대상으로 삼는다. ‘하나님’은 ‘전능한 자’라는 뜻(창17:1 참조)을 가지고 있고, ‘여호와’는 ‘약속대로 이루시는 자’라는 의미(출3:15 참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 여호와는 전능하셔서 약속대로 이루시는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전능하시고 신실하신 분이라는 뜻으로도 이해된다. 이와 같은 하나님 여호와께서 성경적인 믿음의 직접적 대상이 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택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나 주신 다음, 여호와로도 알려 주시기 위하여 백성들을 애굽에서 해방시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나라를 세우도록 해 주셨다.(출6:2∼5 참조) 그것은 하나님께서 일찍이 이스라엘 열조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을 세우시고 그들에게 언약하신 대로 다 이루어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언약하신 대로 이루어 주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 여호와를 알게 해서 믿고 경외하게 하시려는 뜻에서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적인 믿음은 전능하셔서 언약대로 이루시는 구약에 계시된 하나님 여호와를 믿음의 직접적인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2. 예수 그리스도
성경적인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의 간접적인 대상으로 삼는다.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마1:20∼21참조),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히브리 말로는 ‘메시야’(요4:24∼26참조)라고 한다.
메시야는 약속대로 이루시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내어 주시기로 약속한 구세주이다. 구약에서 기름을 부어 세우는 선지직이나 제사직 그리고 왕직은 모두가 여호와께서 보내어 주실 메시야 약속에 대한 모형적이며 그림자적인 직임들이다. 그러므로 참 메시야는 선지직과 제사직 그리고 왕직을 모두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육신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신 예수는 이 세가지 직임을 모두 가지고 계신 자이기 때문에 예수는 그리스도(메시야)가 되시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경적인 믿음의 간접적 대상이 되시는 것은, 구속주로 오신 예수가 구약의 약속대로 오신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을 통하여 하나님이 약속대로 이루시는 여호와가 되심을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이 여호와가 되심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는 이유는 구약에서 증거하는 대로 하나님이 여호와가 되심을 알고 믿게 하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성경적인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 여호와께서 직접적인 대상이 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간접적인 대상이 되신다.
Ⅵ. 믿음의 실제(實際)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은 성경적인 믿음의 실제 곧 참 상태는 어떠한가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실제에 대하여 말하기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11:1~2)”고 하였다.
1. 바라는 것들의 실상(實狀)
성경적인 믿음의 실제는 바라는 것들의 실상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바라는 것”이란 하나님 여호와의 약속이 성취되기를 기대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리고 “실상”이란 하나님 여호와의 약속이 성취된 실제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는 것은 하나님 여호와의 약속이 성취되기를 기대하는 것의 실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의 실제는,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미쁘심, 즉 신실성에 의하여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여호와의 약속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이 인간의 허황된 욕망에 의한 소원들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들의 실상은 하나님 여호와의 신실성을 기초로 하지 아니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성경적인 참 믿음의 실제가 아니라 거짓 믿음의 실제에 지나지 않는 망상에 불과한 것이다.
성경적인 참 믿음은 한번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신실하심을 기초로 두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 여호와께서 약속하신 것들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들은 실상과 다름없이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곧 성경적인 참 믿음의 실제인 것이다.
2.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證據)
또 하나의 믿음의 실제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로 나타난다. 여기서 “보지 못하는 것”이란 하나님 여호와의 약속이 아직 이루어지지 아니한 것을 말한다. 그리고 “증거”란 하나님 여호와의 약속들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증명하는 근거를 말한다. 따라서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는 것은 아직 이루어지지 아니한 하나님 여호와의 약속들이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확실히 증명하는 근거를 말한다.
이같은 믿음의 실제 역시 한 번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미쁘심, 즉 신실성을 기초로 할 때에만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여호와의 약속과 관계가 없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는 모두가 거짓된 증거일 뿐만 아니라 참 믿음의 실제가 될 수 없는 것이다.(요8:13∼18참조)
결론적으로 성경적인 믿음의 실제는 한번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약속하신 대로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미쁘심, 즉 신실성에 기초된 것들임을 알 수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하기를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나이 늙어 단산했으나 다시 잉태하는 힘을 얻었던 것은 약속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미쁘신 줄 알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히11:11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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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용기 원로연구원 (성경신학학술원,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명예총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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