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탐구로서의 교의학, 진리를 찾는 좁은길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I/1 읽기(21)
『교회교의학 I/1』 §1.2 「탐구로서의 교의학」을 다시 한번 정리할 필요가 있다. 이는 이 단락이 “Karl Barth의 진리관”을 간결하게 반복, 요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르트에게서 교의학은 이미 확보된 교리를 정리하는 작업이 아니라,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탐구의 행위로 규정된다. 이 규정은 곧 진리를 어떻게 이해하는가라는 근본 문제와 직결된다.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좌파와 우파에 대한 논쟁이 극단적으로 전개되는 경향이 있다. 이 논쟁은 종종 좌파와 우파에 대한 개념적 이해 없이, 상대편을 거부하기 위한 낙인으로서 ‘극우’ 혹은 ‘좌파’라는 범주를 사용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대립은 개념의 충돌이라기보다, 상호 배제를 목적으로 한 언어의 대립에 가깝다.
일반적으로 우파는 사유재산을 긍정하고 존중하며, 이를 사회 질서의 중요한 기반으로 인식한다. 이와 유사하게 진리 이해에 있어서도 진리의 불변성과 객관성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인다. 진리는 이미 확립되어 있으며, 그것을 보존하고 수호하는 것이 중요 과제로 여겨진다. 반면 좌파는 사유재산의 절대성을 비판하고 균등분배에 대한 지향성을 강조하며, 진리 이해에 있어서도 역사적·사회적 조건 속에서 형성되는 상대성을 중시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바르트의 진리관은 이러한 좌·우의 이분법적 구도 안에 쉽게 포섭되지 않는다. 바르트는 진리를 미래에 도래하는 것으로 규정하며(GG., 40), 교리를 이미 완료된 노작으로 이해하는 방식을 거부한다(GG., 41). 더 나아가 그는 진리를 미래적인 하나님의 결단으로 제시한다(GG., 42). 이는 진리가 인간의 인식이나 교회의 교리 체계 안에 고정되어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물론 바르트는 진리의 불변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진리는 하나님 자신이기에 변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한다. 그러나 그 불변성은 교회나 그리스도인이 소유할 수 있는 형태의 불변성이 아니다. 바르트에게서 진리는 인간에게 주어진 소유물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 편에 속해 있으며, 인간은 그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위치에 놓여 있다.
따라서 바르트의 주장에 따르면,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진리를 이미 확보한 주체가 아니라, 진리를 찾아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좁은 길 위에 서 있는 존재이다. 『교회교의학』 §1.2에서 말하는 “탐구로서의 교의학”은 진리의 상대화를 의미하지 않으며, 동시에 진리를 완결된 형태로 소유했다는 확신을 허용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진리가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교의학과 교회를 끊임없는 질문과 책임의 자리로 되돌려 놓는 규정이다.
우리는 Karl Barth가 진리의 불변성(준용, Mutatis mutandis)을 견지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문제는 바르트가 그 불변한 진리를 교회가 이미 파악하여 소유하고 있다고 보지 않고, 교회가 여전히 그 진리를 탐구하는 위치에 놓여 있다고 주장한 데 있다. 이 지점에서 바르트의 진리관은 공교회의 신앙 형성과 긴장 관계에 놓이게 된다.
교회가 공적으로 반복하고 고백해야 할 내용은 교리이며, 공적으로 결정된 문서이다. 교회는 사도적 신앙을 요약한 사도신경(혹은 믿음의 규칙, regula fidei)을 공적으로 고백해 왔으며, 381년 콘스탄티노플 신경이 채택된 이후에는 이 신경을 공적 문서로 수용하여 예배 가운데 반복적으로 고백해 왔다. 이러한 공적 고백은 개인의 신앙 고백이 아니라, 교회 전체가 기억하고 전승하기로 결단한 신앙의 형식이다.
이에 비해 개인 신학자의 해석과 신학적 사유 체계는 존중과 참조의 대상이 될 수는 있으나, 그것을 반복재생해야 할 당위성은 발생하지 않는다. 개인의 의견을 반복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이지, 교회의 의무가 아니다. 교회는 어떤 신학자를 따르도록 부름받은 공동체가 아니라, 공적으로 고백된 신앙을 보존하고 전승하도록 부름받은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는 신학적 탐구를 수행할 수는 있으나, 그 탐구가 공적 고백을 대체할 수는 없다. 교회가 반드시 수행해야 할 행위는 개인의 해석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공적으로 결정된 고백문을 매 예배 가운데 반복하여 선포하는 일이다. 공적 신경의 반복은 교회의 선택 사항이 아니라, 교회 됨을 유지하는 필수 조건이다.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다(딤전 3:15). 예수께서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고(요 8:32),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 더 이상 종의 굴레를 벗고 자유자가 되라고 외쳤다(갈 5:1).
그런데 바르트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진리를 소유하거나 확증하는 위치에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바르트에게서 진리는 하나님께 속해 있으며, 교회와 신자는 그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탐구의 여정 위에 놓여 있다. 이 지점에서 바르트의 교회 이해는 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기능과 긴장 관계에 들어선다.
필자는 교회는 진리를 확증하는 기관이고, 대학은 진리 탐구 기관이라고 구분한다. 본래 대학도 진리 확증 기관이었는데, 근대를 넘어서면 회의주의와 인식론적 불확실성의 영향을 받아 진리 탐구 기관으로 전환되었다. 그런데 바르트는 교회도 진리 탐구 기관으로 전환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바르트는 교회가 진리를 확증하는 것을 ‘교만’이라고 하고, 교리를 인간학적 진술의 결과로 평가한다. 그래서 과거 신학 명제(교리)를 반복 재생하는 것을 맹목과 무지로 평가한다. 매우 경건하게 진리의 척도인 성경주석 작업을 통해서 탐구하는 교의학을 제언한다. 바르트의 주장이 바르트의 것이라면 괜찮지만, 그의 주장은 세르베투스의 주장과 재세례파적 주장을 현대화시킨 것이다.
해 아래 새것은 없다. 모든 사유는 과거의 어떤 사유에 근거하여 연속 계승한다. 사유 분류에는 크게 진리불변성과 진리상대성이 있다. 이것은 소피스트의 상대주의(인간은 만물의 척도다)로 혼란한 아테네에 소크라테스가 던진 진리불변성의 도전(보편적 이성이 진리의 근거)이다. 그런데 사유 체계가 칸트 이후 혼란한 아테네로 전향되었다. 그 전향에 속도를 증가시킨 중요한 역할을 칼 바르트가 교회에서 했다. 바르트는 교부신학의 반복을 거부하며 보다 새롭고 신선한 신학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귀결은 진리의 불변성보다는 진리의 상대성, 확증보다는 탐구, 고백보다는 미래로 가는 탐구로 전환했다. “탐구로서의 교의학”은 새로운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교리가 아닌 “다른 옛것”의 반복 재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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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 형람서원) 이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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