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거짓, 너에게는 진실
<언더커런트>
목욕탕을 운영하던 신혼부부. 성실하고 사람 좋던 남편이 하루아침에 실종된다. 아내는 몇 달간 폐인이 되어 남편의 종적을 찾지만 실패한다. 우연한 기회로 탐정에게 의뢰를 하게 된다. 그리고 알게 된 사실. 남편은 자의로 떠났다는 것이다. 말 한마디 없이 사라져 버린 것. 부부가 담담하게 마주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남편은 이야기한다. 나는 단 한 번도 너에게 사실을 말한 적이 없다고. 늘 속이기만 했다고. 결혼생활도 거짓이었으며 그 거짓의 무게에 짓눌려 도망치게 된 것이라고 말이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아내보다 독자가 더 충격을 받았으리라 예상된다. 아무 언질 없이 사라져 버린 남편과 끝끝내 알게 된 진실도 모두.
아마 아내가 진실을 알고 싶어 했더라면, 알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면 달라졌을까. 왜 그녀는 그러지 못했을까. 아내는, 어디까지나 아내의 입장과 눈으로 ‘사랑하는 남편’을 대했기 때문은 아닐까. 그가 어떤 사람인지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자기 남편으로서의 이 남자를 받아들이는 것 말이다.
이쯤에서 생각해본다.
우리는 자신의 몸 안에 갇혀 세상을 본다. 몸은 무수한 경험과 생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를테면 환경, 성격, 성장배경, 트라우마, 열등감, 언어, 사념과 관념. 그것들은 프레임을 만들고 우리는 그것을 통해 세상을 받아들인다. 그 프레임의 또 다른 이름은 ‘주관’이다.
이 주관은 개성이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한계가 되기도 한다. 주관 때문에 인간은, 해석의 틀을 쉽게 바꿀 수 없다. 주관에 의한 오류를 특히 인간관계에서 많이 본다. 말 한마디나 표정, 태도 때문에 빚어진 오해나 호도, 그로 인한 미움 같은 것들. 상대방은 나무 밑이 시원해서 앉아 있는데, ‘저 놈 저거! 나무를 베어 가려고 저기 있구나!’ 하고 내 식대로 생각하는 바람에 생겨나는 다툼들. 사실 미움이나 증오, 경멸 같은 감정들은 나로 인해, 나에게만 나타나는 것들이다. 내 강력한 주관 때문에, 전적으로 옳(다고 믿는)은 내 프레임 때문에. 슬프지만 그것은 결국 나 자체이며, 그 고집 센 ‘나’가 중간에 떡 버티고 선 탓에 상대방의 진실을 영영 보지 못한 채 헤어지게 된다.
정도가 심한 사람들(지독한 나르시시스트들 혹은 패배의식에 빠져 사는 자들)은 호의를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호의를 호의로 여길 줄 몰라서이다. 자신의 프레임이 워낙 뒤틀린 채로 견고해진 탓에, 내밀어진 손도 공격의 대상으로 인식한다. 안타깝지만 이런 사람들에게는 호의를 베풀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푼다면, 음험한 목적이 있거나 도덕성을 과시하고 싶어서일 것이다. 그 시간에 개랑 산책이나 하는 게 훨씬 정신건강에 이롭다.
아무튼, 결국 다 자기 ‘수준’에서 상대방을 이해하고 정의한다는 이야기다. 모두 타인의 진실엔 관심이 없다. 내가 원하는 대로 상대방의 가치를 평가하고 적당히 이용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당신은 누군가에게 미끄러짐이나 곡해 없이 전적으로 받아들여지는가? 당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몇이나 있는가? 그것이 당신에겐 중요한가?
예전의 나에겐 중요했다. 지금의 내게도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예전처럼 ‘모두’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팔 안의 사람 한둘이면 된다. 그리고 행여 부족함을 느끼지 않을까 싶어 야훼의 사랑도 꿰차게 해주셨다.
성경을 공부하다 보면 공통된 관점을 가질 수 있다. 개개의 육체 안에 갇혀 그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는 인간들이지만, ‘하나님의 관점’으로 그 한계를 초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강의를 듣고, 함께 공부하고, 말씀을 나누는 그 시간만큼은 우리 모두 각자의 주관을 뛰어넘어 돈독한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니 말이다. 참, 쉽지 않은 일을 우리는 매주 교회에서 목격하고 자행한다. 물론, 교회에 가지 않을 때엔 또 그때그때, 주어지는 일들을 하나님 앞에서 해석한다. 신앙 수준의 차이만 있을 뿐 관점은 같다.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문득 욕실에 멍하게 서서 지난 30년을 쭉 회상한 적이 있다. 단 몇 초 만에 끝나 버렸다. 예전에 들었던 ‘영원’에 대한 강의가 새삼 떠올랐다. 그렇구나, 그곳에선 이 지상에서의 일이 하나의 점처럼 금세, 단숨에, 압축해서 끝나 버릴 수 있는 일이구나. 풍부한 깊이로 시간을 초월한 그 세계가 지금 내가 사는 이곳을 함의한 채로 초월해 있다는 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보이지 않은 세상에 대한 이해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전제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가치가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삶의 방식이 다르다.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은, 야훼를 알고 그의 섭리를 믿는 사람에 한해서였다. 누구도 세계를 이렇게 볼 순 없을 것이다.
관계 맺음 없이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이기에, 가정과 사회와 교회를 통해 여러 갈래의 관계들을 만들어 주신 하나님의 섭리에 감사한다. 주관을 갖는 건 쉽지만, 공통의 관점을 갖는 건 쉽지 않음을 배웠고, 그랬기에 하나의 관점과 뜻으로 찬양할 대상이 있다는 사실에도 감사한다. 각자가 가진 주관은 하나님 안에서 모으고, 모인 주관들이 힘을 발휘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 땅 위에 실현해 갈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아름다운 그림이 어디 있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