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루카스(Lucas)와 클라우스(Claus)는 이름의 철자 순서만 다른 쌍둥이 형제다. 그들의 삶은 전쟁 속에서 진행된다. 폭격과 공습, 굶주림에 대적해 가까스로 하루를 이어간다. 그들은 결코 ‘착한’ 아이들이 아니다. 국경을 넘기 위해 아버지를 미끼삼아 지뢰밭으로 보내고 그가 엄청난 굉음과 함께 터져 죽자 안전한 길로 냅다 달린다. 그리고 형제는 헤어지게 된다. 헤어진 그들이 서로를 찾는 -그러면서 각자의 삶을 사는- 내용이 (중)권에서 펼쳐진다. 하지만 (중)권을 읽다보면 어느 새 기묘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중)권이, (상)권의 모든 내용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첫 권을 읽었을 때 확실하다고 생각했던 최소한의 캐릭터가 다음 권으로 넘어가면서 마구 뒤섞인다. 아니, 아예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된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하)권으로 가면 그 기이한 현상은 절정에 달한다. 루카스와 클라우스 각각의 가족 관계도, 처음에 알고 있던 것과 점차 거리를 벌린다.
소설은 총 세 권이지만, 마지막 권의 마침표까지 꼼꼼하게 살펴도 내가 무엇을 읽는지, 이것이 하나의 얼개로 이어진 글이 맞는지, 무얼 말하고자 하는 건지 알 수 없어 공황상태에 놓이게 된다. 루카스가 클라우스고, 클라우스가 루카스인데 루카스는 루카스가 아니고, 클라우스는 클라우스가 아닌 패러독스에 직면하는 것이다. 이는 독자의 집중력이나 이해도와는 하등 상관이 없다. 매우 곤혹스런 소설이 아닐 수 없다. 어떤 기자는 ‘독자는 어느 페이지, 어느 줄에서나 문득 자신이 읽은 것 중 어떤 것도 확실한 것은 없다는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라는 서평을 남겼다. 그것이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 이 책에서 말하는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 무엇인지 나는 아직 찾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애초에 거짓말이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 소설이 지닌 함축적, 중의적 의미와 구조, 제목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내가 살고 있는, 나를 둘러싼 이 세계와 내가 확고하다 믿었던 진리에 대해 ‘의심’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는 것이다. 모서리부터 조금씩, 내가 쌓아왔던 것들이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대체 무엇 때문에 확신에 차 있었던 걸까.
목사님과 나는 다르다. 부모님과 나는 다르다. 하지만 엄마 말씀처럼 나는, 목사님과 부모님의 신앙(수준)을 내 신앙이라 착각하며 살아왔다. 이것이 참인지 진리인지, 진리라면 어떠한 근거를 갖고 있는지, 왜 진리인지, 그저 의심 없이 순순하게 받아 들여왔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신앙은, 내게 독이기도 했다. 검증 절차가 없었던 것이다. 당연히 의문을 가져야 할 것에도 ‘다~ 하나님의 뜻이다!’를 대입시켜 쉽게 답을 내렸고, 골치 아픈 일이 있으면 하나님을 방패막이로 요리조리 피해왔다. 그런 식으로 육체의 기회를 삼는 데에 쓰라고 이 말씀을 주신 건 아닐 텐데 말이다.
해야 할 공부를 제 때 하지 않고 ‘뺀질’거리다 보니 겉만 그럴싸하고 속은 텅 빈 느낌이다. 그것이 쌓이고 쌓여 한계에 이른 것 같다. 모든 것을 뭉뚱그려 ‘하나님의 뜻’이라고 대답할 수 있었던 나 자신은, 실은 제대로 된 질문조차 갖지 못하는 멍텅구리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신기한 건, 하나님의 존재는 믿어진다는 것이다. 다행히 ‘진리’라는 명확한 도착점이 있으니, 이제 성실하게 하나하나 짚고 살피며 걸어가는 일만 남았다. 진리를 향해 가는 여정은 숨 가쁘면서도 쓰고 달콤하다. 어떤 지식이든 ‘하나님’을 대입해 속편하고 빠른 결론을 얻으려는 요행을 피하느라 숨이 가쁘고, 세상의 무수한 지혜자들이 명석한 두뇌로 집필한 저서 속에서 결코 ‘확실함’ (진리)을 찾을 수 없기에 쓰며, 어찌됐건 나는 도달할 진리가 있기에 달콤하다.
공부해야겠다. 하나님의 지혜로 무장해야겠다. 하나님을 알기 위한 지혜는 구하면 주신다 하셨으니 기도도 열심히 해야겠다. 할 게 너무나 많아 짧은 인생이다. 하나님의 지혜로 모든 것에 통달하는 날이 오면,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 무언지 간파해낼 수 있을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