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장 28절 문화명령인가? 언약인가?
5월 11일, 경북대학교에서 <기독교, 학문 그리고 대학>을 주제로 학술회가 있었다. 분과 토론으로 김규욱 목사님은 ‘문화명령의 근거로 해석된 창세기 1장 28절에 대한 재해석’이라는 주제로 발표했다. 다소 긴장되어 보였지만 차분하고 정연하게 발표를 하셨다.
창세기 1장 28절의 삼대 언약을 ‘문화’명령으로 이해하는 데 무리가 있다는 언어학적 지적을 시작으로, 그것이 문화명령이라고 주장하는 전통 개혁주의 입장들을 정리하였고, 문화명령이라고 이해될 시 발생하는 오류들을 지적하였다. 특히 개혁주의 조직신학자들은 성경의 내재적 논리를 따라가지 않고,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 하려 성경을 인용하는데, 이는 성경 본래의 의도를 왜곡하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언약은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복으로 특별계시의 범주에 속하는 반면 문화는 인간의 활동으로 일반계시의 범주이며, 언약은 예수께서 성취할 일이고 문화는 인간이 수행할 일로 그 범주가 구별된다. 하여 문화명령으로 해석하는 전통은 해석학적 오류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이에 ‘전통 언약 신학적 관점의 편협성을 비판적으로 극복’하는 최근의 두 신학자를 소개하나 구속사적 틀을 성경 전반의 구조로 이해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음을 지적한다.
창세기 1장 28절이 언약의 내용이며 하나님 계시의 세계관을 드러낼 수 있는 ‘작정-언약-성취-계시완성’의 출발임을 주창하는 성경신학적 언약성취사의 관점을 소개하였다. 성경이 하나님의 자기계시서이며, 오직 성경 자체만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개혁신학의 해석적 입장을 고수한다. 아담에게 나라를 약속하시고 동일한 언약을 아브라함에게도 계승하며, 신약의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그 언약(나라)을 성취함이, 그리하여 여호와는 언약대로 이루시는 분임을 확인하게 하는 것이 언약성취사적 성경신학의 핵심이며 앞서 제기되었던 문제들에 대한 새로운 대안이자 해답이라 제시하였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면서도, 인간의 책임론을 견지하는 태도를 보며 일원론적으로 하나님을 알고 이해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체감했다. 하나님 안에 전적으로 포함된 인간이 아닌, 하나님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을 별개로 구분하는 지적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했을 때 발생하는 모든 번거롭고 위험한 일들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강박적인 노력 같았다. 그러면서 완벽하게 정합성을 갖춘 성경신학적 언약성취사의 교리도, 여러 가지 신학적 이론들 중의 하나 정도로 여기는 듯하여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학술회에 참관하면서 여전히 많은 신학자들과 기독대학 교수들이 구속사적, 이분법적 신앙관을 견지하는 데 충격을 받았다. 특히 주제 발표 시간에 ‘신앙과 학문의 통합’의 근거를 에베소서 4장 13절의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고”에서 찾는 (믿는 일=신앙, 아는 일=학문적 노력 learning) 부분에서 당혹감을 느꼈다. 품위 있는 언어와 태도를 갖춘다는 것이 성경을 제대로 해석한다는 뜻은 아니다. 게다가 참여자들이 가지고 있는 책자를 읽어 내려가는 식으로 한 시간여 이상 주제발표를 진행했는데, 지루한 연설을 듣고 있는 듯하여 괴로웠다. 김규욱 목사님의 논문발표 후에도, 꼬투리를 잡거나 혹은 자신의 학식을 자랑하기 위한 공격적이고 수준 낮은 질문이 있어서 막연하게 동경하며 고상하다 여겼던 ‘학문’의 세계도 실은 세속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다. 핵심은 작은데, 그 핵심을 말하기 위해서 불필요한 말들과 시간이 낭비되었다고 느꼈던 건, 말씀운동 안에서 핵심을 구조적이고 체계적으로 공부하는 데 익숙해져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불필요한 예식과 형식을 타파하기 위한 움직임이 교회 뿐 아니라 학계에도 적용되야 하는 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아울러 인본주의적 지식은, 신본주의의 지혜만 확실하게 통달하고 있으면 꿰뚫을 수 있다는 확신도 얻게 되었다. 그리고 말씀운동의 목사님들처럼 학자들과 교류하기 위한 자생력도 키워야 하겠다. 이것이 진리임을 이제는 ‘바깥’ 사람들에게 입증하고, 그들의 질문을 받아내는 지성과 배포를 기르기 위해 더욱 무장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