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교육개혁을 제창한다 (3)
현대교회 성경교사의 귀족화를 단호히 경계한다. 귀족은 사회적으로 특권을 지닌 상류계층에 속한 사람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안에 특권을 지닌 상류계층이 존재한다는 것은 성경이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나 현대교회는 성경교사인 소위 목사라는 직임은 교회의 최고 권력을 지닌 귀족으로 군림하고 있다. 교회의 강도권과 치리권 및 인사권을 비롯한 재정권까지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다. 장로나 집사 및 권사 등 직임자 성도 누구도 감히 넘볼 수 없는 상류계층으로 분류되어 있다. 이는 종교개혁 이전 로마 카톨릭교회의 이층 교회관에 따른 지도층 교회의 잔재로써 반드시 일소되어야 한다.
성경교사의 귀족화 현상은 잘못된 교회체제의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교회는 체제적으로 상류계층의 귀족을 양산하기 위해 고도의 교육제도를 만들어 놓고 있다. 거액의 경비를 들여 특수 교육과 훈련을 거치도록 하고 있다. 대부분 세속 철학과 헛된 속임수를 신학으로 포장해 가르친다. 그뿐 아니라 사람의 유전과 초등 학문에 지나지 않는 것들을 가르친다. 배우는 자로 자신이 상류층에 속하는 귀족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결국 몸에 화려한 가운(gown)까지 입혀 거창한 의식절차를 거치게 해서 교회의 특권층으로 군림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보장되어 있다.
현대교회의 교육제도는 귀족을 양산할 수밖에 없는 본질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다. 문제를 인식하고 있다 하더라도 대안을 찾을 수 없어 모른 채 묵인하고 있다. 소위 큰 교단의 명문신학교가 있는가 하면, 저급한 지도자를 양산하는 군소교단의 무명신학교도 난립하고 있다. 무명신학교 출신이라도 한두 번만 갈아타면 명문신학교 출신의 지도자로 둔갑한다. 결국 명문신학교 출신이나 무명신학교 출신이나 결국 귀족 신분으로 구별되어 특별한 권리를 소유한 특권층이 된다. 중세시대 성직매매가 새롭게 포장되어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기독교의 올바른 교사라면 마땅히 가르쳐야 하는 것이 성경인데, 이를 누구도 분명하게 알지 못하는 실정이다. 따라서 교사는 수사학적인 능란한 언술로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기만 하면 많은 사람이 모여 교회가 부흥을 이룬다. 그럴수록 교사는 더욱 능력 많은 지체 높은 귀족의 대접을 받게 된다. 그러다가 급기야 교주로 둔갑한다. 이러한 과정이 곧 교회 부패와 타락의 수순으로 이어진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신불신을 막론하고 어느 누구나 모두 죄인이며 귀천을 따질 수 없다. 모두가 죄 중에 잉태되고 죄악 중에 출생하여 죄를 범하며 살고 있는 존재임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비록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라 할지라도 깨어진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에 불과하다. 그리고 비틀어지고 쓸모없는 조각목과 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하나님께서 귀히 쓰시거나 천히 쓰시는 경우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질그릇 조각이나 조각목 자체는 귀한 것이 아니다. 설령 귀하게 쓰임을 받는다 해도 질그릇 조각이나 조각목 자체가 본질적으로 귀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본래적으로 종교적 속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따라서 때에 따라 종교적 욕구를 충족시키며 살고 싶어 한다. 더욱이 특정한 종교인일 경우는 누구보다 종교성이 더욱 강하게 작용한다. 그런데 눈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매우 막연하게 여겨진다. 그래서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대상을 섬기고 싶어 한다. 이것이 우상을 제작하여 숭배하는 종교행위가 발생하게 되는 이유이다. 이러한 종교적 숭배현상이 무엇보다 제일 먼저 나타나는 경우가 귀족화된 종교지도자를 섬기는 행위이다. 성도가 소위 귀족화된 성직자를 섬기며 만족해하는 이유는 주의 종에게 충성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교회 귀족들은 진리처럼 가르치며 그렇게 해야 구원을 받고 천국도 간다고 부추기는 자들도 있다. 그리고 성도들이 성직자를 거역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행위와 동일시하도록 훈련시킨다.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에 지나지 아니한 자가 ‘주의 종’이라는 이름으로 자기 성찰은 온데간데없이 스스로 귀족의 자리에 군림한다. 미숙한 성도는 귀족으로 군림한 성경교사를 신의 대리자 지위에 모시고 평생 충성을 다하여 섬긴다. 그리고 자신의 종교적 본능의 욕구에 대한 충족을 신앙의 결과로 착각하며 만족감을 누린다. 더 불쌍한 경우는 귀족이 된 성직자의 관심과 인정을 받는 것을 마치 신으로부터 인정받는 것처럼 즐거워한다. 귀족에 대한 충성과 섬김의 정도에 따라 신앙적 성숙의 경중을 가름한다. 그리고 권력을 가진 종교 귀족들의 승인과 인정에 따른 보람과 만족을 진정한 신앙적 행복으로 착각한다.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지체들은 서로 섬기기도 하고 섬김을 받기도 한다. 이는 한 몸인 지체에 대해 무례히 행치 아니하는 사랑의 표현으로써 지체간의 단합과 협력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준다. 그런데 성도들 상호간에 일방적으로 섬기기만 하거나 섬김 받기만 하는 경우는 건전하고 올바른 신앙행위가 될 수 없다. 다만 교사가 받은 은사에 전념할 수 있도록 성도의 자원하는 사랑의 경제적 합력이 있을 뿐이다. 현대교회는 제도적으로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가 한평생 성도의 물질적인 섬김을 받도록 제도화되어 있다. 따라서 귀족이 된 교사를 변함없이 잘 섬겨야만 충성스런 성도로 인정을 받는다. 그렇지 못하는 성도는 교회나 교사로부터 버림을 당하기 일쑤다.
성경을 배우거나 가르치는 교사인 목사나 기타 모든 성도는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섬기는 봉사자들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모든 직임자는 합력해서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뜻을 이루어가는 동역자들이다. 그리스도께서 성도 각자에게 믿음의 분량을 따라 은사를 주셨다. 그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사랑의 봉사를 통해 은사를 실현하게 하신다. 이렇게 모든 지체가 합력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도록 섭리하신다. 따라서 교회 안에 일방적으로 섬김만을 받도록 구별되어 있는 특권층인 귀족의 자리는 반드시 배제되어야 한다.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께서 받아야 할 영광을 탈취하는 자들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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