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수의 손맛
<한식대첩>
토너먼트 형식의 오디션이 지천이다. 종목도 다양하다. 최근에 즐겨본 프로그램은 ‘한식대첩’과 ‘마스터 쉐프 코리아’였다. 맛집을 소개하거나 직접 음식을 하는 프로보다 요리의 에센스를 더 집약적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보게 되었다.
인간의 생명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마지막까지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되어야 하는 섭생. 어느 순간 내가 먹는 음식에 지루함을 느끼면서 다른 사람들은 뭘 어떻게 먹는지 궁금했던 것이 저 프로그램들을 찾아보는 계기가 된 것 같다. 슈퍼에서 늘 고르던 재료, 빤한 음식이 아닌 진짜 ‘맛’과 그 맛을 만드는 과정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인 대결의 장. 자부심과 긴장이 공존하는 조리대 앞. 풍성하게 널린 식재료들이 다듬어지고 양념이 되고 열이 가해지면서 주어진 타이틀에 걸맞게 조리되는 모습이 특히 신기하고 재밌었다. 단맛을 내는 재료가 물에서는 어떤 맛, 불에서는 어떤 맛, 매울 때는 또 어떤 맛을 낸다는 점 또한 그리 신통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문득, 사람에게는 참 다양한 면면이 있고,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면이 만나 화학작용을 하는구나 싶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에게 장점과 단점이란 건, 장본인을 제외한 타인에겐 큰 의미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나의 단점도 다른 누군가에겐 사랑스럽고 바라온 부분일 수 있고, 상대가 장점이라 여기는 부분도 내게는 싫을 수 있으니. 훌륭한 요리사는, 좋은 재료가 낼 수 있는 최상의 맛을 내게끔 요리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나에게 가장 적합한 상대는 내 특징과 개성을 선명하게 드러내어 내가 나임을 인식하고 사랑하게 해주는 사람이 아닐까 한다. 가장 궁극의 나, 나의 본질을 나만큼 잘 이해하고 끌어내 주는, 그리고 충분한 믿음을 주는.
또 하나는 성경에 대한 이해였다. 성경은 상징과 은유, 메타포를 함의 하고 있는 고서이다. 시대와 목적, 인물에 따라 무수히 다양한 해석을 끌어낼 수 있다. 이 책을 어떻게 요리하느냐에 따라 구속사적으로, 성경신학적으로 혹은 아예 사이비적 기독교가 탄생할 수도 있다. 여기서 요리와 가장 큰 차이가 발생한다. 요리는 그것을 먹는 대상을 위함이 목적이자 기쁨이지만, 성경해석의 주체는 오직 하나님, 목적 또한 하나님의 영광인 것이다. 인간의 입맛에 맞추려고 애써서는 안 된다. 가장 주요한 의도가 변질되기 때문이다. 가끔 다른 교회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을 때마다 놀라는 게 그런 부분이다. 성경 구절 하나를 읽고, 생활에 맞춘 ‘적용’ 설교를 한다. 성도들은 그 설교를 듣고 위로와 힘을 얻고 자신들의 생활에 보탠다. 물론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쁘지 않다’는 것이 정답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런 설교를 할 수밖에 없는 입장도, 찾아 들을 수밖에 없는 쪽의 심정도 이해할 수 있다. 그렇기에 더 대단하다고 생각이 드는 건 하나님의 말씀을 오직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 올곧이 전하는 분들이다.
충실하게 성경에 입각한 하나님 섭리의 목적과 의도와 결과를 중심으로 정연하게 진행하는 설교를 들으면 꼭 잘 차려진 한정식 한 상을 마주 대하는 것처럼 마음이 벅차고 흐뭇하다. 굳이 내 입맛을 겨냥하지 않았음에도 준비하는 자와 접하는 자에게 동시에 감동과 은혜가 전해지는 점도 신기하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참 독특한 재료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다루기 쉬워 보이지만 까다롭고, 자칫 잘못했다간 육즙이 빠져 퍽퍽해지기 마련이니. 대책 없이 연거푸 우려내기만 해대면 고약한 맛이 날 수도 있다. 하지만 탄탄한 내공을 갖춘 고수가 칼을 집어 든다면 잠을 자다가도 웃음이 나게 마련인 훌륭한 맛을 낼 수 있는 그런 재료.
성경연구에 늘 힘쓰는 목사님들께, 스승의 날을 맞아 큰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고수의 손맛을 어설프게라도 배워보고자 성경공부에 정진할 것을 스스로에게도 다짐해 본다. 하루아침에 셰프의 요리를 흉내 낼 수 없듯 매일 같은 시간과 같은 양, 그리고 정성을 들여 노력해야겠다. 이에 하나님께서 아낌없이 지혜를 부어주시길 기도드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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