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작성일 : 10-04-02 14:14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인간에게, 죽음의 의미

<데이비드 게일>, <노킹 온 헤븐스 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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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죽음은 어떤 의미일까. 우리는 죽음을 막기 위해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데이비드 게일), 죽음에 대한 공포를 반전시키기 위해 유머를 첨가하기도 한다. (노킹 온 헤븐스 도어) 어떤 이는 현세에서의 삶이 끝이라고 한다. 그럴 경우 인류의 역사와 철학은 의미를 상실하거나 무기력해지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또 어떤 이는 내세를 믿는다. 그러나 그것을 신과 연결시키지는 못한다. 찰나의 생에 대한 허무를 부정하고 싶기 때문에 내세를 꿈꾸는 것이리라. 허나 확신 없는 내세에 대한 막연한 기대는 두려움을 가중시킬 뿐이다.

 자신의 존재, 존재의 목적, 존재의 끝 죽음. 이는 인간의 가장 궁극적인 의문이지만 불행하게도 성경을 통하지 않고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기도 하다. 이는, 성경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생과 사의 미스터리를 평생 짐처럼 안고 살아감을 뜻한다. 이미 여기서부터 택자와 불택자의 차이가 벌어지는 것이다. 

 영화는 어떤 식으로 죽음을 다루고 있을까. <데이비드 게일>과 <노킹 온 헤븐스 도어>가 있다. 이들 영화는 죽음을 무겁지 않게 건드리면서도 진지한 성찰과 재미를 동시에 제공한다.

 <데이비드 게일>은 ‘사형제도의 치명적 결함’에 관한 메시지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만, 영화의 장면 사이에 나열된 ‘죽음’에 관한 담론에 허를 찔리는 부분이 많다. 명망 높은 하버드 대학의 교수가 하루아침에 제자를 성폭행하고, 동료 교수를 살해한 파렴치한으로 전락하여 사형 날짜를 받아놓고 죽을 날을 기다린다. 그의 행적엔 분명 심상치 않은 구석이 있었고, 주인공 기자는 그에 관해 취재를 하다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된다. 그 교수와 함께 사형제 폐지 운동을 했던 살해당한 동료 교수는, 이미 백혈병에 걸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었고 언제든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면 자신의 죽음으로 할 수 있는 값진 일을 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개인의 능동적 죽음’을 통해 ‘제도의 수동적 죽임’이 얼마나 위험하고 오만하며 실수투성이인가를 증명한다. 이 죽음은 사람의 목숨이 담보된 증거이기에 이는 몇 천 명의 서명보다 더 유력하고 강력한 힘을 확보한다. 이 영화에서 죽음은, 단순한 ‘생의 마침표’ 이외에 더 확장적인 의미를 지닌다. 피할 수 없는 순리를 주인공들은 자신의 손으로 먼저 받아들이고, 그 결과를 타인에게 특혜로 제공한다. 그들에겐 태어남과 성장 같은 삶의 과정처럼 죽음 역시 그에 불과하다.

 <노킹 온 헤븐스 도어>도 마찬가지이다. 불치병에 걸려 죽음을 코앞에 둔 두 명의 병실 동료가 마피아의 돈을 우연찮게 훔쳐 신나게 도주한다. 그 돈으로 평생에 걸쳐 해보고 싶었던 일을 다 한다. 병원을 떠날 때부터 들고 있던 데낄라 한 병을, 바닷가에까지 가져 온다. 파도를 보며 데낄라를 마신다. 그리고 한 남자가 먼저 쓰러진다. 남겨진 남자는 글로 풀어낼 수 없는 복잡한 표정으로 수평선을 응시한다. 그들에겐 시종일관 시덥잖은 농담과 말장난 유머가 따라붙는다. 죽음이 꼭 심각할 필요는 없잖아? 두 남자는 죽음을 향한 여정에 즐거운 콧노래를 부른다.

 영화 속 인물들은 죽음을 받아들임에 있어 덤덤했다. 하지만 그것은 ‘담대함’ 보단 ‘체념’에 가까운 덤덤함이었다. 어떻게든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해보이지만 죽음으로 시작될 (혹은 끝나는) 세계에 대한 믿음이 없는 ‘센 척’은 쉽게 무너지기 마련이다.

 크리스찬인 우리에게 죽음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째, 나의 끝을 안다. 아니, ‘죽음’이 나의 끝이 아님을 안다. 내가 어디로부터 와서 어떤 과정을 거쳐 어디로 가게 될지를 명확하게 안다. 고대부터 철학자들이 끊임없이 고민하고 연구해오던 궁극적 질문에 대한 해답을, 하나님을 통해 편리하게 얻을 수 있었다. 성경신학의 이 지식은 전 방위적인 무기이다. 삶과, 삶의 목표와 태도, 이상, 의지 모든 것들에 가치를 부여하고 진실을 제공한다. 바울의 말처럼 ‘죽어도 좋고, 살아도 좋다’. 회의주의나 냉소가 아닌, 확실한 근거에 기인한 이 한마디는 우리의 삶을 통째로 지탱해주는 강력한 힘인 것이다.

 둘째, 예수님의 ‘죽음’이다. 그의 죽음을 통해 나는 구원함을 얻었고 영원한 천국행 티켓(!)을 쥐었으며 엄청나고 특별한 지혜-그로 인한 평안함까지-를 획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죽음은, 보통의 사람들이 느끼는 부정적이고 막연한 의미가 아닌 보다 구체적이고 뜻 깊은 의미로 내게 와 닿는다. 
 설령 죽음의 순간이 두려워 식구들의 바짓단을 붙들고 늘어지게 될 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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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와 기쁨
37,다윗에게 왕을 약속하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