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분’이 무엇이기에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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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분을 위한 죽임과 죽음이라는 것은 사실, 명분의 정의부터가 모호하므로 상당한 리스크를 안고 출발한다. 자칫하면, 그 정의를 검증할 새도 없이 죽음이라는 결과가 도래하는데 이는 생명과 존엄과 인권을 오직 하나의 잣대로 절단하는 것과 같다.
1920년. 아일랜드인인 데미언은 영국군의 횡포를 목격하고 독립운동을 시작한다. 그가 몸담은 조직을 배신한 어린 동지는, 그 대가인 죽음에 당연하게 임한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데미언을 친형처럼 따르던 아이였다. 그가 당연하단 듯이 죽음에 응한 것처럼 데미언 역시 당연하게 총을 빼어든다. 그들은 명분 앞에 당당했으며, 그것이 조국을 위한 일이라 믿었다. 총탄 한 방에 어린 동지의 몸이 부질없이 쓰러진다. 데미언은 꾸역꾸역 울음을 참으며, 그의 시체를 추스르고 하나뿐인 그의 어머니에게 비보를 전한다.
영국군에 대항한 아일랜드군의 투쟁은 소기의 성과를 달성한다. 영국과 평화 조약을 맺게 된 것이다. 그러나 평화 조약으로 인해 독립군 내부에 균열이 일어나며 분파가 생긴다. 결국 데미언과 소시적부터 친구였던 형이자 독립군의 동지가 데미언을 처리하기 위해 당당하게 총을 빼어들게 된다.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이다. 대신 쏴주겠다고 하는 동료의 호의도 거절한다. 비장하고 엄숙하게, 하나의 의식을 치루는 것처럼 신중히 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긴다. 그 역시 그것이 조국을 위한 일이라 믿었다. 그 또한 죽은 데미언을 붙들고 오열한다.
데미언의 아내에게 찾아가 그의 죽음을 전하고 도망치다 시피 떠난다. ‘당신을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아!’ 등 뒤에 꽂히던 그 말은, 언젠가 데미언이 어린 동지를 죽이고 그의 어머니에게 들었던 말이었다.
데미언이 영화의 주인공이기 때문에, 관객은 별 다른 의심 없이 그의 사상과 행동을 따라가게 된다. 그러나 막판 뒤집기와도 같은 영화의 후반부에선 가슴이 철렁한 충격을 느낀다. 그리고 그제야 ‘의심 없이’ 따라가선 안 되었구나 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어린 동지를 죽이던 데미언의 확신에 무임승차해선 안 되는 것이었다. 그 역시, 누군가의 확신에 의해 죽임을 당하므로.
그렇게 그들은, 명분이란 미명하에 유린당한다. 비극은 되풀이 되고 또 다른 명분의 대가가 되어 끝날 수 없는 참담한 싸움을 계속해나간다. 제 손으로 죽인 자의 가족에게, 자신이 직접 소식을 전하는 그 무자비한 당당함의 근거는 무엇일까.
명분은 이렇게 우습고 또 이렇게 무섭다.
진정 가치라고 생각했던 것들, 진리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시간 앞에서 무수히 말을 바꾸고 의미를 뒤집는다. 어제의 진짜가 오늘의 거짓이 되고, 오늘의 확신이 내일엔 전복된다. 그럼에도 인간은 그에 인생을 배팅하고 자신의 온 시간을 바치며 목숨을 건다. 그들이 장렬하게 내놓은 생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나 그 뿐이다.
우리는 변하지 않는, 결코 변할 수 없는 ‘진리’를 가지고 있다. 이 진리는 보통의 사람들이 말하는 그들 각자의 진리들과는 다르다. 이것은 ‘우리만의 진리’가 아니다. 누구나 확인하고자 달려들면 확인할 수 있는 완벽하고 치밀한 진리다. (물론 그 후의 믿음은 택자와 불택자의 문제이지만 말이다.) 목숨을 걸만 하고, 또 걸어야 하는 진리가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진리가 손 안에 있다는 생각에 안일해지지 않나 자문해본다. 우리의 이 진리부터, 최선을 다 해서 샅샅이 알자는 다짐을 한다. 그 후에 생겨나는 확신이, 곧 명분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명분으로 인한 죽음은, 결코 허무와 냉소를 동반하지 않는 값진 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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