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절망 앞에서 더 큰 절망을 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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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시의성이 있는 영화가 아니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 앞으로는 영화 선택에 구애받지 않을 예정이다. 이슈가 되는 영화를 주제로 하면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는 있으나, 영화의 깊이나 감동이 스스로는 영 마뜩치 않아서이다. 이제는 지면을 할애할만한 의미가 있거나,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영화(혹은 책)들을 소개해볼까 한다.
6년 전에 개봉한 영화를 최근에 보았다. 제목은 <피아니스트>. 전쟁 영화라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이래저래 피해 다녔었는데 친구가 ‘예술 영화’라고 소개를 했다. 전쟁은 배경일 뿐이고, 피아니스트의 아름다운 음악과 생이 주를 이룬다고 말이다. 그래? 매우 신나하며 영화를 다운받았다. 그리고 영화가 끝나기 3분 전까지 ‘피아니스트의 아름다운 음악과 생’을 기다리던 나는 넉다운이 되었다. 요즘말로 완전히 ‘낚였’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봤어야 하는 영화라고 친구는 말했다. 그의 의도를 알기에 크게 낙담하진 않았다. 하지만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나는 대답할 것이다. 그 영화를 본 것을, 아직까지도 후회하고 있다고.
나는 전쟁을 경험한 세대는 아니다. 하지만 그 참상이 어떻다는 것 정도는 안다고 할 수 있다. 무수하게 보아왔던 책들이나 영화를 통해서 전쟁의 끔찍함에는 어느 정도 친숙함(!)까지 느끼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나치 수용소나 731부대의 만행을 고발한 노골적인 다큐멘터리도 얼마나 자주 접할 수 있는가. 그래서 어느 정도는 충격에 무뎌졌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피아니스트>는 그러한 나의 자신감을 한방에 무너뜨렸다.
2차 세계대전의 서막이 오르고 경제적인 부족함 없이 살던 주인공 스필만의 가족들은 유대인 강제 거주지역
인 게토로 이주한다. 그 곳에서 그들은, 인간이 더 이상 인간일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을 보고 듣고 겪는다. 밤이면 어둠보다 더 숨 막히게 내려앉는 공포. 그것을 공기처럼 마시고 사는 것이다. 어느 날은 이웃의 한 유대인 가족들이 저녁식사를 하려는데, 독일군이 들이닥친다. 가족들은 자리에서 일어설 것을 강요당했고, 그 중 휠체어에 앉아있던 아들은 일어서지 못했다. 독일군은 휠체어 채로 들고 테라스로 가 아들을 아래로 던져버린다.
아들은 그대로 머리가 깨져 즉사한다. 그의 가족들에겐 빨리 달아나 보라고 한다. 혼비백산으로 도망가는 그들의 뒤에서 낄낄 웃으며 총을 난사한다. 독일군들은 마치 시뮬레이션 게임을 하는 짓궂은 십대들 같았다. 그렇듯 인간에의 유린은 매일같이 반복되었고, 스필만의 가족들은 그 참혹한 비명과 공포 속에서 결코 죽음보다 못한 삶을 살았다. 그들은 결국 유대인을 실어 죽음으로 나르는 기차에 탑승한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가스실로 가는 기차였던 것 같다.) 스필만은, 평소 그에게 호감을 가졌던 유대인 공안원 덕에 기차를 타지 않고 겨우 목숨만을 부지한다.
여기서 ‘겨우 목숨만을 부지한다’는 문장은 처참한 현실을 담고 있다. 인간의 존엄성, 인권, 생명, 가치… 이런 것들은 그야말로 피상적이고 껍데기뿐인 단어들의 나열일 뿐이다. 살기위해, 단지 살아남기 위해 그는 얼마나 처절하게 바닥을 기던가. 인간이라면 최소한으로 지켜야 할 것들, 혹은 지키고 싶었던 것들을 그는 가차 없이 버리고, 허물고, 무너뜨린다. 숨이 붙어있는 한, 어떻게든 살고 싶어 안달한다. 살아남아 죽음을 목격하고, 죽음에게 쫓기고, 죽음의 압박에 시달리는 것. 그 모든 것을 목격하지 않아도 되는 죽음은 차라리 평온한 것이었다. 나는 어쩌면, 이러한 모든 과정들을 깨끗이 절단하고 ‘전쟁’과 ‘죽음’을 문자적으로만 이해했기에 영화가 더 생생하고 강렬했는지도 모르겠다.
폐가에 숨어 허기를 면할 수 있는 철지난 통조림을 발견한 스필만의 눈앞에, 독일 장교의 군화가 보였다. 어떻게 이곳에 있냐는 그의 싸늘한 질문에 죽음을 예감한다. 스필만의 직업이 피아니스트였다는 사실을 안 장교는 폐가의 내부에 자리한 피아노 앞에 그를 앉힌다. 그리고 스필만은, 자신의 생에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피아노 연주를 시작한다. 절망 앞에서 더 큰 절망을 연주한 피아노 소리는, 뼈가 뚝 뚝 부러지는 것처럼 아뜩하고 아름다웠다.
영화는 그렇게 보여줄 뿐이었다. 달아나는 자와 쫓는 자, 그리고 살아가는 자들을.
후유증은 꽤 오래 갔다. ‘인간이라면 그렇게까지 악랄할 순 없는’ 독일군의 모습을 보면서, ‘인간이라면 그렇게
까지 처절할 순 없는’ 유대인의 모습을 보면서, 이 땅 위에 살아가며 대단한 위업을 이룩한 것 마냥 어깨에 힘을 주는 우리 인간들이 실은 참 별 거 아니구나 싶었다.
더불어 인간이 별 게 아니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의지할 대상이 있음이 얼마나 행복한지. 전쟁의 황폐함만을 가득 비춰낸 스크린을 벗어나 밖으로 나오니 저절로 안도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섭리하시는 모든 방편과 과정 중에, 그래도 전쟁이라는 최대의 재앙을 겪지 않고 이리 편하게 당신을 배울 수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물론 내공 깊은 신앙인이라면 전시에도 감사가 나올 수 있어야 하겠지만 나는 아직 그 단계는 아니니까 ^^) 심지어, 하나님의 민족이 아닌 이방인임에도 감사했다. 조금의 부당함에도 목소리를 높이고, 털끝만 한 불편함도 참지 못해 핏대를 세우는 지금이, 그럼에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지금이 나는 너무나 좋고 행복하다. 버스를 타도 차별 없이 내가 앉고 싶은 자리에 앉을 수 있어 좋고, 죽음의 위협에 노출될 염려 없이 아무 곳에나 돌아다닐 수 있다는 것도 좋고, 친구와 가족들이 다치거나 징집되거나 죽지 않아서 좋고, 어떠한 야비한 폭력이나 위협도 없이 나 하고픈 대로 편하게 살 수 있어서 너무 좋다. 공포에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게 얼마나 엄청난 평화인지 모르고 살았었다. 나는 그냥 하나님이 하루하루 내려주신 맛난 음식을 먹으며, 하나님이 인도 하시는 대로 되어지는 대로 즐겁게 재밌게 신나게 살면 된다. 어려울 게 전혀 없다는 말이다. 나는 정말 축복받은 사람인 듯. 그야말로 Olleh~!!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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