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도 비참한 <마돈나>
이제, 보는 내내 입안이 바싹 마르는 이런 식의 비참함은 싫다. 이 비참함은 그냥, 무턱대고 센, ‘폭탄 맛’처럼 자극적인 양념 혹은 조미료 따위에 불가하다. 꼭 이렇게 해야만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는 걸까. 이렇게까지 삶을 헤집고 들쑤셔야만 예술성이 드러나는 걸까. 극악무도한 토끼몰이 앞에 노골적인 속살이 드러나는 게 과연 아름다운 건가. 난 잘 모르겠다.
<한공주>, <무뢰한>, <마돈나> 이 세 영화에서는 여자가 사회적인 구조나 폭력의 희생양으로 그려진다. ‘약자’의 포지션에 들어맞기 때문에 선택된 여자들. 그래서인지 영화 속 그녀들의 삶의 태도 같은 건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그녀들이 씩씩하든, 위기를 극복하려 애쓰든, 그건 영화의 주요한 흐름이 아니며 관객의 관심사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녀들이 무얼 해도 영화는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 슬프고 섬뜩하다. 어쩌면 그래서 더욱 현실에 가깝다고 할 수도 있겠다. 현실은, 정말로 그러하니까.
가장 최근에 본 영화는 <마돈나>. 대학 병원의 VIP병실에 몇 년째 입원해 있는 노인. 할 수 있는 건 호흡뿐인, 사실상 식물인간 상태의 환자이다. 그의 아들은 노인의 재산 때문에 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강제적으로 심장을 이식하고 생명을 연장한다. 이번에 심장을 기증할 희생양은 ‘마돈나’라는 별명을 가진 여자. 할머니 밑에서 자란, 왕따를 당한 것으로 학창시절을 보내고, 애정결핍에 바짝 쪼그라든 여자다. 뚱뚱하고 볼품없는 외모에 가진 것이라곤 조금 풍만한 가슴이 전부인, 남자들의 흑심과 애정을 구분하지 못하는 불쌍한 여자. 그녀의 인생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게 <마돈나>의 흐름이다. 결국 흘러흘러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되고 정신을 잃은 채, 강제로 심장 이식을 당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 그녀. 그녀는 죽지만, 그녀의 자기 삶의 동력이었던 아기는 태어난다. 얼핏 희망을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아기가 그녀의 의미를 대변한다면 말이다.
모르겠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정직하고 성실하게 사는 사람들은 불행하다. 정당한 보상과 평가를 받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들에 비해, 덜 노력하고 더 야비한 사람들이 풍족하다. 옳지 못한 방법으로 착취를 일삼고, 진짜와 가짜를 섞어 혼탁하게 만드는 자들은 그렇게 당당하고 폼 나게 살 수가 없다. 참 답답할 노릇이다. 어떤 네티즌의 뼈 있는 한마디, ‘왜 부끄러움은 언제나 우리의 몫인가요’가 떠오른다.
땅콩 회항이나 세월호 같은 일련의 사태들을 보면서 무력해지기도 한다. 거대 권력은 그 크기도 힘도 너무나 거대해서, 개인의 열망 같은 것으론 아무것도 바꿀 수 없으니.
하나님은 부조리로 가득한 이 피조세계에서 무엇을 배우게 하시려는지 생각해 본다. 속된 말로, 믿을 건 당신밖에 없다! 하게끔 만드시려는 건지, 피조세계의 한계와 인간의 악함을 더 깊게 경험하라시는 건지, 부족하고 모난 부분을 깎아 다듬으시려는 건지. 그러다 아주 짧은 순간 번쩍 스쳐 지나간 생각은 ‘상식’대로 돼야 한다는 나의 믿음이 혹 건방진 것은 아닌가 하는 것. ‘이렇게 되는 게 맞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거나 때가 아니라면 그에 대해 수긍도 할 줄 알아야 하는 건가 하고 말이다.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건 하나님의 뜻은 정의(正意)와 일맥상통한다는 것이다. 그 정의라는 것은 철저한 당신의 계획과 섭리에 입각한다. 성경 인물들의 삶의 면면을 보아도 그렇다. 원인에 따른 결과는 분명 있다. 그래서 지금 좀 뒤틀리고 힘에 겨워도 당신의 뜻을 견고히 새기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마돈나’도 그걸 알았다면 조금은 덜 고통스럽지 않았을까. 부당함을 부당함으로 느끼며 분개하는 대신, 자신의 할 일을 하며 묵묵히 걸어갔다면 힘들어도 행복하지 않았을까. 모든 일에 대한 맺음이 있는 때는 꼭 온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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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20장 6절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의 의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