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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한국기독교역사학회 정기 학술심포지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기독교’라는 주제로 열려…대한민국 임시정부 관련 기독교계 문헌은 상대적으로 빈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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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은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이 100주년 되는 해로 정부를 비롯하여 민간단체, 기독교계 등이 다양하고 의미 있는 행사를 개최했었다. 1919년에 일어난 획기적이고 결정적인 두 사건 중 3.1운동은 기독교 교계와 학계의 상당한 주목을 받으면서 수많은 논문들을 쏟아내며 학술대회를 열었으나, 반면 임시정부 수립과 존속 과정에서 기독교인이 한 역할과 기여, 즉 임시정부와 기독교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두 번의 학술대회만 개최되어서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했다.
그중에 한 행사가 지난 2일 (사)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와 한국기독교역사학회가 주최하는 ‘2019년 한국기독교역사학회 정기 학술심포지엄’이 서울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부속창고 강의실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기독교’라는 주제로 열렸다.
이날 제1발표자로 나선 이재근 교수(웨스트민스트신학대학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기독교: 상호관계의 유형과 특징’이라는 주제로 발제했다. 이 교수는 “임시정부 수립보다 3.1운동에 관심이 더 많았던 것은 시기적으로 더 앞섰고, 대규모 군중이 전국에서 독립 의지를 만세 시위로 폭발시킨 시민혁명과 같은 사건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민족대표, 시위 주도자, 참여자 통계에 기독교인 비율이 두드러지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3.1운동은 을사늑약(1905년) 전후부터 타오르던 기독교인의 항일민족운동이 정점에 이른 사건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한국 민족의 자결과 자유, 정의와 인도뿐만 아니라, 인류 공영까지 포괄하는 3.1독립선언의 의의는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위대한 한국인의 나라 ‘대한민국’이 4월 11일에 탄생함으로써 구체화될 수 있었다”며,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탄생은 ‘대한민국의 첫 번째 봄’을 알리는 새싹이었고, 이것이 성장하여 맺은 열매가 1945년 8월 15일의 독립이었다”고 전했다. 또한, 이러한 점에서 “3.1운동과 임시정부 설립은 연속된 발전과정으로 보아야 하며,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기독교인 및 조직들은 이어진 임시정부 탄생과 1945년까지의 유지, 그리고 항일투쟁 과정에도 다양한 형태로 관여했다”고 했다. 그러나 3.1운동에 대한 기독교계의 연구 성과가 상당한 데 반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관련 문헌은 상대적으로 빈약한 것을 토로하기도 했다.
이 교수는 계속해서 임시정부 내부의 기독교 요인들의 활동들을 소개하면서, 3.1만세운동이 상해 임시정부 성립으로 연결되는 데 가장 크게 기여 한 인물로 감리교 목사 현순을 소개하기도 했다. 현순이 상해에서 활동한 1923년 2월까지 그가 임시정부 수립과 통합 과정에서 맡은 역할은 외양(外洋)에 산재한 애국지사와 연락하여 단결한 행동을 취하려고 하여 서에서 안창호, 동에서 이동휘, 북에서 이동녕, 이시영 등을 영합하여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또 구미에서 외교를 주로 하는 이승만을 영래하여 독립운동의 대본영을 설치하려는 것 즉, 무대 뒤의 주연 배우 역할을 했었다고 밝혔다.
그리고 그는 임시정부 외부 기독교인 후원자들의 활동과 임시정부와 중국 관내 기독교인 공동체인 교회와 학교를 지역별로 자세하게 열거하기도 했다.
이어서 발제문에서 결론을 도출하면서 임시정부의 수립과 유지, 항일 투쟁, 승인 노력 과정에서 기독교인의 참여율이 높았다고 강조하면서, 특히 상해 임시정부 초기 정부 각료와 의정원 의원에 선출된 기독교인 비율은 특별했다며, 그 이유 중 하나는 “임시정부가 헌장에서 선언한 서양 공화국 체제와 자유민주주의, 법치주의 같은 ‘근대사상’을 서양인 선교사와 접촉해서 개종과 더불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접할 기회가 가장 많은 집단이 기독교인일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기독교인의 높은 참여율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독교적’ 정체성은 의심스럽다. 기독교인의 다수의 적극적인 참여와 주도, 지배가 있었다고 해서 이 운동이 기독교 운동이라 말하기는 쉽지 않다”며, “운동의 내용이나 시위 저항 방식에 역사적 기독교 윤리학의 유형으로서의 비폭력 평화주의나 인도주의와 정의에 근거한 저항 사상이 철저하게 적용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고 했다. 민족과 인종, 계급과 성별, 신분의 경계를 초월하는 ‘보편적 세계시민주의로서의 기독교’와 자민족에 대한 애정과 자긍심, 타민족에 대한 저항을 바탕으로 하는 ‘배타적 민족주의로서의 애국독립운동’ 간에 표면상 모순된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고민거리라고 했다. 다시 말해서 그 당시 임시정부의 기독교인은 이 운동에 기독교인으로 참여한 것인가? 아니면 한국인이기 때문에 참여한 것인가? 이 교수는 후자에 가까울 것이라고 답했다.
이 교수는 임시정부와 기독교 관계에 다원성과 차이가 존재했고, 임시정부 내부 독립운동 노선에서 이승만의 외교독립노선, 안창호의 실력양성준비론, 이동휘의 무장투쟁론 등 최소 세 갈래의 차이가 있었으며, 이러한 차이는 통합 임시정부가 수립되기 이전부터 지역, 인물별로 존재했다고 했다.
이러한 사실로 세 임시정부 통합과정에서도 걸림돌이 되었고, 형식적으로 통합 상해 임시정부가 탄생한 후에도 여전히 분쟁의 씨앗이 있었으며, 해방 전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뚜렷한 대결구도를 보인 서북 대 비서부(기호) 양상이 임시정부에 참여한 기독교인에게도 감지되었다고 했다. 그 예로 임시정부 내 기독교인 다수는 서부(평안/황해) 출신으로, 이들은 안창호와 김구로 계승되는 실력양성론의 노선을 따랐고, 이승만의 외교론은 주로 기호(경기 및 남부) 출신 감리교 지도자들의 몫이었으며, 이동휘의 무장투쟁론은 함경도와 간도, 연해주의 거친 지역에서 활동한 무장 독립운동 단체들과의 연결고리뿐만 아니라, 공산혁명을 완수한 러시아의 영향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라고 했다. 임시정부 내 기독교인 주류는 안창호, 김구의 실력양성론을 따르는 서북 출신 기독교인이었던 것 같고, 물론 모든 개별 인물들에게 이런 일반화가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연이어 제2발표는 이혜원 교수(연세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개신교 선교사: 미화서관을 중심으로’와 제3발표는 최상도 교수(호남신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기독교 여성: 임시의정원 여성의원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으로 각각 발제했다.
편집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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