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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역사학회 제410회 학술발표회’ 온라인 개최
‘해방정국기 한경직의 건국신학 연구:
전도입국론을 중심으로’라는 주제로 발제
한국기독교역사학회(회장 이재근)는 지난달 14일 ‘한국기독교역사학회 제410회 학술발표회’를 온라인으로 개최했다.
이날 전인수 교수(강서대, 한국기독교역사학회 연구이사)의 사회로 김일석 교수(장신대 역사신학 박사)가 ‘해방정국기 한경직의 건국신학 연구: 전도입국론을 중심으로’라는 주제로 발제 그리고 송훈 교수(숭실대 초빙교수)가 논찬했다.
김 교수는 한경직은 1945년 8월 직후부터 1948년 8월 제1공화국이 탄생하기 전까지 3년간을 지칭하는 해방정국에서 새로 건설될 나라는 기독교 민주주의 국가가 되어야 하며, 그 방책으로 전도를 통한 건국론 즉 ‘전도입국론(傳道立國論)’을 펼쳤다고 했다.
한경직은 교회는 당회(堂會)라는 기구가 상징하듯 대의민주제로 운영되는데, 따라서 교회가 많아질수록 그 안에서 훈련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대거 사회로 진출하게 되면서 나라 역시 점진적으로 민주화가 될 것으로 본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김 교수는 “해방정국 당시에 새로이 세워질 나라의 정체(政體)가 될만한 후보군으로는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를 비롯하여 기독교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역시 공존하고 있었다. 이 가운데 한경직은 기독교적 민주주의 국가야말로 최선이라고 여긴 반면 공산주의를 국가와 교회의 적으로 지목하였다”고 말했다.
김 교수의 발제 중점 내용은 “기독교적 민주주의를 지지한 한경직의 국가관과 방법론으로 제시한 전도입국론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으며, 공산주의를 배제한 성경적이고 실존적인 근거가 무엇이었는지와 한국 현대사에서 한국 교회와 국가의 관계성이 정초되는 지점을 발견함으로써 미래를 모색하는 데 본 연구의 목적이 있다”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해방 이후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목회자로 자리매김한 한경직의 국가관을 고찰한다는 것은 오늘날 한국 교회가 갖고 있는 국가관의 시원(始原)을 밝히는 연구”이며 “해방정국에서 한경직의 기독교적 민주주의의 선택과 공산주의의 배제는 서북청년단을 추동할 만큼 강력한 신학적 담론으로 기능하여 전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국가관으로 자리 잡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오늘날 광화문의 태극기 집회 논란에서 보이듯 한국 교회의 국가관은 도전받고 있으며 성찰과 재검토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한경직 연구를 통한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관한 시원성의 고찰은 한국 교회가 기존에 유지해오던 국가관을 재설정할 수 있는 향방을 결정하는 데 역사적 맥락과 근거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계속해서 그는 전도입국론의 역사적 배경으로는 뜻밖에 찾아온 해방과 1948년 8월까지 3년간 미국이 군정(軍政) 실시하면서 미국은 중공과 소련 등 공산주의 세력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하여 남한을 민주주의의 보루로 만들고자 했고, 특히 기독교의 진흥을 통하여 이 목표를 이루고자 했다고 했다. 또한 한국말에 능통한 것과 남한의 사정을 잘 아는 미국 선교사들을 통해 행정적 실무를 대신하게 하고 교회를 적극 후원하게 되면서 일본의 적산(敵産)인 서울 내 천리교 소유의 부동산을 조선신학교 측에 불하함으로써 영락교회 창립의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
또한, 해방정국의 대표적인 민족지도자들이자 우익 3영수로 불리던 김구, 이승만, 김규식 세 사람은 1945년 11월에 정동제일교회에서 열린 임정요인 환영대회에 참가해 해방을 맞아 조국에 돌아온 감격을 토로함과 더불어 앞으로 만들어갈 나라, 즉 기독교적 건국론에 대해 나름의 청사진을 제시했다고 했다.
전도입국론의 형성 과정의 민족적 배경으로 한경직이 오산학교에서 그 당시 설립자 남강 이승훈과 교장 고당 조만식과의 만남, 그리고 1921년 숭실대학에 진학하여 민족보다 교회를 앞세우는 교육을 받았다고 하면서 민족지도자 양성을 목표로 삼은 오산학교와 달리 미국 장로교 선교사들이 세운 숭실대학의 학풍은 교회지도자 양성에 치중했기 때문에 민족을 섬기기 위해 과학자가 되기 위하여 화학을 전공하던 한경직은 재학 중 목회자로서의 소명을 받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한경직은 신학을 보다 깊이 있게 공부하기 위해 스승인 블레어(방위량) 선교사의 도움으로 미국 유학을 준비하게 됐고, 목회자가 되더라도 한경직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일한다는 정신만큼은 일관되게 간직한 채 미국으로 유학, 엠포리아 대학교에서 철학과 역사 전공 졸업 후 프린스턴 신학교에 진학하여 목회자가 되기 위해 신학적 목회적인 수업을 본격적으로 받게 되었다고 했다. 신학교 졸업 후 한경직은 건강 악화로 요양 후 회복하여 1932년 귀국했다.
김 교수는 한경직이 해방 직후 신의주에서 월남하게 된 동기는 기독교 사회민주당에서의 활동 내용과 기간 때문이며, 영락교회 창립 이후로 한경직은 철저하게 목회자로서 자기 자신을 자리매김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교회 초창기에 영락교회 청년들 가운데 몇몇이 한경직 목사가 행한 설교를 녹취하여 『건국과 기독교』라는 제목의 설교집을 간행하게 되었다. 이 설교집에는 1946년에서 1947년 사이에 행했던 설교 가운데 27편이 따로 추려져 실려있다. 이는 영락교회 강단에서 선포된 한경직의 모든 설교를 총망라한 것이 아니라 해방정국 시기에 “건국”이라는 시대정신에 초점을 맞추어 발화된 것들을 의도적으로 발췌, 편집하여 1949년에 출간한 것이었다. 이처럼 한경직은 새로운 나라를 건설해야 하는 역동적인 시대에 건국의 방향과 방법을 묻는 대중들, 특히 기독교인들을 위해 설교를 통해 해답을 제시하고자 했었다.
이어 한경직은 전도입국론을 통해 교회 안팎으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주요한 기여를 하게 되었다고 했다. ▲해방을 맞아 기독교적 민주주의 국가 수립의 당위성을 설교하여 남한 사회에서 민주주의 국가 수립의 기독교적 정당성을 제공하였다. ▲교회를 세우는 것이 곧 나라를 위하는 길이라 여겨 건국론을 선교론으로 치환하여 교회와 사회를 유기적으로 연결했다. 이를 통해 나라와 민족을 위해 봉사하는 교회론을 창출하여 이후 세워지는 교회의 모범이 되었고 교회와 국가의 관계성을 새롭게 정립하게 되었다. ▲교회 성장을 위한 신학적 기틀을 마련했다. 전도를 통한 건국운동은 필연적으로 민족복음화 운동으로 연계될 수밖에 없었고 실제로 한국 교회는 1960년대 이후로 폭발적인 교회 성장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한경직의 전도입국론 문제점 중 하나가 신학의 한계 ▲성경주해의 빈곤함 ▲낭만적인 인간론과 낙관적인 역사관 ▲민주주의 이해의 빈곤함 ▲공교회성의 약화 ▲곡해된 정교분리의 원칙 ▲분단신학으로 기능 등을 지적했다.
김 교수는 결론에서 “한경직은 해방 당시 서북 지역을 대표하는 목회자 가운데 한 명이었고 월남 이후 영락교회를 창립하여 부흥시키며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인물로 부상하게 된다. 따라서 해방정국에서 한경직이 견지하던 국가관 및 정교분리관 곧 교회와 국가의 상관성을 추적하여 밝히는 작업은 오늘날 한국 교회가 갖고 있는 국가관의 원형을 탐색하는 작업이 되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해방을 맞아 한경직은 건국이라는 민족적이고 역사적인 과제 앞에서 영락교회 강단을 통해 기독교적 민주주의 국가가 세워지기를 열망하는 설교를 행한다. 그러나 정교분리 원칙에 따라 교회로서는 직접적인 정치운동에 나설 수가 없다고 생각한 한경직은 교회만이 할 수 있는 건국운동을 창안해내는데 그것은 바로 전도였다. 전도가 곧 최대의 정치운동이라는 이른바 전도입국론(傳道入國論)을 확립하여 건국을 위한 교회의 방법론으로 제시한 것이다”라고 하면서 “대의 민주제를 교회정체로 삼는 장로교회가 많이 세워지면 그 교회를 통하여 민주제도를 접하고 익힌 성도들이 사회의 곳곳에 포진하여 민주정신을 발휘하면서 새로이 세워진 나라 역시 자연스레 민주화된다는 논리였다”고 했다.
계속해서 “한경직의 이러한 주장은 그가 체득한 지적이고 신학적인 배경에 기인한다. 한경직은 오산학교에서 서북 지역의 실력양성론을 배우며 개인의 역량을 극대화하여 나라에 봉사하는 선적이고 점진적인 방법론을 깨우치게 된다. 숭실대학에서는 민족에 우선하는 교회를 터득하고 백만인 구령운동의 일환으로 전도대를 이끌며 순회전도의 경험을 쌓았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프린스턴 신학교에서는 구 학파의 교회론을 계승하여 보이는 교회를 굳건히 세우고 확장시켜야 함을 배우게 된다. 이러한 지적인 이력과 체험은 해방정국 시기에 건국이라는 민족적 사명 앞에서 전도입국론으로 발현되어 더 많은 교회가 민주주의 국가를 창출하게 된다는 논리로 전개되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한경직의 이러한 건국신학은 우리나라가 민주주의 국가로 수립되는 기독교적 정당성을 제공하였고, 건국론을 선교론으로 치환하여 교회와 사회를 유기적으로 연결했으며, 교회 성장을 위한 신학적 기틀을 마련하는 등의 기여를 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경직의 방법론은 남북 분단을 신학적으로 정당화하고 말았다. 따라서 한경직의 전도입국론은 해방 이후 한국 교회의 신학적 스펙트럼이 이념에 종속되며 협소화되는 결과를 낳았고 장차 화해를 근간으로 한 통일을 지향하는 신학으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고 했다.
편집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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