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문화

 
작성일 : 11-07-30 16:50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악마의 씨>, 신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여, 악마를 숭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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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의 속도감에 젖어있기 때문에 고전영화의 ‘느림’이 때론 고역스럽다. 그 고역스러움은 몰입의 정도에 따라 크게 느껴지기도, 거의 느껴지지 않기도 하는데, <악마의 씨>는 후자에 해당하는 영화였다. 고의적으로 긴장감을 조성하거나 서스펜스 냄새를 풍기지 않으면서 영화의 장르가 추구하는 목표를 성공적으로 달성해냈다. 어설프고 성긴 배경음악과, 한 눈에 봐도 피가 아닌 페인트를 뒤집어쓴 시체나 흡사 유인원 같은 사탄 등의 조악한 특수효과에 실소가 터지긴 했지만 그것이 로만스키의 연출에 흠집을 내진 못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흥미롭고 완성도 높은 영화란 말이다.

  임산부에게 가장 큰 공포는, ‘뱃속의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것’일 테다. 그 임산부가 병약한데다, 어렵게 한 임신이면 더더욱. 주인공 로즈메리는 이웃집을 선두로, 그들에게 소개받은 산부인과 의사와 남편으로부터 이상한 기운을 감지하게 된다. 이웃집 노부부는 늘 같은 시간에 같은 음료를 몸에 좋은 것이라며 대령해, 로즈메리가 컵을 비우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돌아선다. 산부인과 의사 역시 수상하긴 마찬가지다. 지독한 복통으로 신음하는 그녀에게, 효과가 없는 약을 주며 다른 병원엔 가지 말라고 슬쩍 얘기한다. 남편도 어딘가 미심쩍다. 파티를 열고 싶다는 로즈메리의 의견에 극구 반대를 할 뿐 아니라, 파티에 와주었던 로즈메리의 친구들이 그녀와 함께 있으려고 할 때마다 날카로워지며 초조해한다. 퀭한 눈에 움푹 들어간 볼, 바싹 마른 앙상한 몸의 로즈메리에게 친구들은 걱정스럽다며 다른 병원을 찾아볼 것을 권유하지만 그녀의 보호자인 남편의 완강한 반대와 설득에 넘어가게 된다.

  그러던 중 로즈메리의 오랜 친구가 그녀를 방문해, 이 총체적 난국을 타계할 강력한 동아줄을 놓고 간다. 남편 몰래 다른 의사를 만나는 것. 그러나 함께 가주기로 했던 그는 약속 당일, 모습을 보이지 않고 결국 의문의 혼수상태에 빠져 죽음을 맞게 된다. 그가 로즈메리 앞으로 남긴 한 권의 책은 악마에 관한 것. 책을 통해 그녀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을 의심하기 시작하고, 그녀의 이웃과 남편은 그것을 히스테리라 치부하며 서서히 그녀의 목을 졸라온다. 악마에게 겁탈당하던 그날 밤의 일은 꿈이 아니었다. 그들이, 그녀를 환각 상태로 몰아넣고 악마의 씨를 잉태하기 위해 치렀던 의식이었다. 서서히 밝혀지는 진실. 이류 배우였던 로즈메리의 남편은 스타가 되기 위해 악마와 거래했고, 그들 부부가 살던 아파트는 악마 숭배자들의 소굴이었음이 드러나게 된다.

  위태로운 걸음을 옮겨 문을 열자, 검은 천과 덮개로 꾸며진 아기 침대 주위로 그녀의 이웃들이 축하 파티를 하고 있다. ‘신을 살해하고 세상을 지배할 악마를 위하여!’ 추악하고 무시무시한 현실 앞에서 로즈메리는 무너질 듯 다가가 자신의 아기를 확인한다. 영화의 전개상 아기는 분명히 사탄의 모습을 하고 있었을 것임에도, 로즈메리는 끝내 어찌할 수 없는 모정으로 아이를 어르고 달랜다. 이렇게 영화는 기묘하게 끝을 맺는다.

  종교를 가지고 있든 그렇지 않든 인간은 누구나 알 수 없는 존재에 대한 막연하고 본질적인 두려움을 갖고 있다. 흔히들 말하는 악령, 귀신같은 것들, 거대한 폭포나 산맥 같은 압도적인 자연 앞에 섰을 때의 위축과 외경심,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현상 같은 것에도 일일이 공포를 느낀다. 그 해결되지 않는 두려움은 창조 행위의 동력이 되어 <악마의 씨> 같은 영화를 덥석 내놓게도 한다.

  학창시절 내 친구들은 시험을 앞두곤 미신이나 징크스에 집착했고, 이제는 결혼이나 이직, 취업 등의 문제로 점을 보러 간다. 조상님 묘자리에 물이 들어서 될 일도 안 되더라는 이야기는 전래동화처럼 재밌기만 하다.

  초등부 학생들을 가르치는 요즘, ‘종교’에 대해 전반적인 수업을 하기 위해 자료를 찾았다. 이슬람교, 불교, 유교, 카톨릭, 무속신앙 등. 희미하게 알고 있던 사실을 좀 더 체계화하고 명확히 정리하는 작업을 하면서 혀를 내둘렀다. 근본도 없고, 학문적으로도 ‘진리’의 기본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종교들이 수두룩했다. 그들은 철학을 믿거나, 잡신을 믿거나, 스스로 만들어낸 신을 믿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신은 독단적이거나, 공허하고 난해하거나, 경박스러웠다. 그런 신들에게, 자신의 인생을 의탁하고 가정의 대소사를 묻는다는 게 수치스럽진 않은지, 불안하진 않은지. 연민이 느껴졌다.

  내가 믿는 신은, 신들의 신이다. 당신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하셨으나, 섬기지 못하도록 이미 섭리해놓으신다. 인간의 일, 인간의 세상, 인간의 의지를 결국은 정해져 있던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는 데에 쓰는 막강한 신이다. 인간이 절제하고 포기하고 금욕했을 때에 만날 수 있는 신이 아니라, 당신을 아는 것으로 다른 것들을 사사로이 여길 수 있도록 하는 신이다.

  제대로 된 신을 알고, 제대로 된 선과 악을 안다는 것은 삶의 단단한 뿌리이다. 자잘하고 성가신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땅 속의 뿌리는 얼마나 듬직하고 편안한지. 이 세상 수많은 사람들이 하루걸러 하루 마다 비진리를 선포하고 저마다의 잡신들을 칭송하지만 나는 그 모든 것들의 꼭대기 위에 있는, 자신이 누군지 알게 하기 위해 그런 조악한 것들을 만들어 놓은 ‘대인배’ 신, 야훼를 믿는 야훼의 자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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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니-열기를 걷어내고 차가운 호흡으로 지켜봐야 하는 영화
죽음이 ‘고난’이 아닌 이유 <나 없는 내 인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