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가니-열기를 걷어내고 차가운 호흡으로 지켜봐야 하는 영화
‘이 영화가 과연 담론을 형성하고, 사회 저변의 작은 목소리에 힘을 실어줄 수 있을까’에 관해서 비관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미 재판이 끝난 사건에 대해, 그 결과가 부당한들 재심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닌 데다 겨우 겨우 상처를 외면-‘회복’이라는 단어를 쓸 수가 없다. 그들에겐 회복이란 없을 것이므로-하고 살아가는 아이들을 괜히 들쑤셔 놓는 건 아닌가 해서였다. 그런 까닭에 이 영화를 보러 오는 사람들이 흘리는 눈물까지도 냉소적으로 여겼다. 저 사람들은 <도가니>를 왜 선택했을까. 자극적이기 때문에? 연민으로? 호기심에? 아니면 의무감으로 인해? 설령 어떤 폼 나는 이유로 본다고 하여도 그들에겐 그저 그럴듯한 명분을 가지고 사회적 반향의 대열에 합류하는 정도가 이 영화가 낼 수 있는 최고의 효과일 것이고 그들이 지금 당장은 가해자를 잡아 죽일 것처럼 무시무시하게 떠들어대지만 그것은 상영 직후의 일회적인 감정일 뿐이며 결국 그게 전부라고. 그들이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이다.
그러나 속단을 내리기에 영화의 진정성은 꽤 단단했다. 관객들은 분노했고 움직였으며 법률과 미디어가 해주지 못한 재판과 처벌을 훌륭하게 수행해주었다. 현재, 서명운동이 10만 가까이에 이르렀으며 그로 인해 가해자들에 관한 전면 재수사가 시작되었고 사건 관련 해당학교가 폐교를 검토 중에 있다. 소외당한 자들을 돌보는 손길이 소수이면 그것은 ‘봉사’가 되지만 다수라면 그것은 ‘상생’이 된다.
동명의 소설 <도가니>를 읽고 이 사건을 반드시 세상에 알려야겠다 결심하여 제작사에 찾아갔다던 공유의 연기는 ‘진짜’였다. 그는 반반하고 트랜디한 스타배우가 아닌, 정당한 분노와 그에 걸맞는 행동력을 갖춘 의식 있는 청년이었다. 감정의 고저를 잘 표현했으되 과잉되지 않았고 비현실적이게 평정하지도 않았다. 마치 그 현장의 가운데에 선 교사처럼, 괴로워하고 분개하고 그러나 자신의 현실에 좌절하며 이길 수 없는 싸움에 체념하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가 소리 없이 영웅으로 추앙받을 수 있었던 건 아마도 그의 연기 이전에 자리하는 사람으로써의 고뇌, 사회 구성원으로써의 책임감 그리고 진심 때문이지 않을까 한다.
영화를 보면서 기분이 가라앉았던 건, 가해자들이 저지른 행위의 근원에 대한 회의 때문이었다. 가해자들은 사회적으로도 관계적으로도 약자일 수밖에 없는 ‘장애인-학생’에게 극도의 변태성과 폭력성을 드러냈는데, 그러한 모습들이 우리 안의 어딘가에도 분명 내재하고 있을 것임에 치가 떨려왔다. 반듯한 규범과 제도가 준비되어 있지 않은 한,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붙들어주시지 않는 한 나는 언제든 그런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추악한 인간인 것이다.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사실이 매우 불편하고 불쾌했다.
어린 아이를 강간하고 구타하고 싶은 욕구. 비약일지 모르겠으나 (학문적 논의를 떠나) 모든 욕구는 ‘자기중심성’에 기인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쳐갔다. 하나님을 떠나 인간의 본성을 판단할 때 ‘성악설’이 더 설득력 있다는 것도 그 때문이다. ‘내’가 성욕을 풀고 싶기 때문에, ‘내’가 때리고 싶기 때문에 라는 욕구에서의 ‘나’는 거부할 수 없을 만큼 강한 것이어서 이겨내지 못하는 것이다. 내 중심에 ‘신’이 아닌 ‘내’가 있기 때문에.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적어도 이 사회가 요구하는 옳고 그름의 기준에 서서 정의를 지켜나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며 할 수 있을까. 문득 말씀을 들으며 혼자 좋아하고, 진리라는 무기에 혼자 쾌재를 불렀던 내 자신이 경멸스러워졌다. 진리라면 이러한 부조리들은 모두 괜찮은 것일까? 예정된 일이었으니 그저 ‘그러려니’하고 넘겨야 하는 걸까? 나는 보다 더 숭고한 명분의 일을 해야 하고 이 일은 타자에게 맡겨야 하는 걸까? 아니 애초에 맡을 사람이 따로 있다는 식의 생각도 용납이 되지 않았다. 삶 속에서, 나와 같은 세상에 사는 사람들의 고통과 아픔을 직면할 때마다 한 번씩 딜레마에 빠진다. 그러면서도 결국은 원래 걷던 길로 담담하게 돌아서는 스스로에게 헛웃음이 난다.
노대통령 재임 시기부터 현 정권 초에 이르기까지 무수히 부딪치고 무수히 깨졌던 나의 작고 소소한 투쟁과 반항들이 기억났다. 바꿀 수 없기로 된 것은 무슨 수를 써도 바꿀 수 없고, 바꿀 수 있기로 된 것은 내가 팔짱을 끼고 물러나도 바뀌게 되어 있더라. 그러나 나는, 수수방관한 자세로 ‘내 꺼’에만 열심을 냈던 나보다 훗날 포기할지언정 현장에 뛰어들어 아우성을 치는 내가 더 좋았다.
하나님께 맡겨 본다. 어떤 방식으로 나를 쓰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