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현실화하는 진실의 힘 <빅피쉬>
에드워드는 병상에 누워 시간을 보내는 노인이다. 그에게는 아들 윌과 며느리가 있다. 며느리는 항상 침대 맡에 앉아 에드워드의 이야기를 경청한다. 에드워드는 왕년에 ‘끗발 날리는’ 모험가이자 영웅이었다고 한다. 그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성장병으로 남보다 성장 속도가 빨랐고, 못 하는 스포츠가 없는 데다 발명왕이었으며, 자신의 주변은 물론 마을에 산재한 모든 문제의 해결사였다. 마을의 유명인사였던 그는 보다 더 큰 세상을 만나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그 곳에서 그는 판타지 소설 속에나 나올 법한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재크와 콩나무’에나 등장할 거인을 만났다는 사실은 가소로운 웃음거리에 불과하다. 하반신이 붙은 샴쌍둥이 쇼걸 자매는 물론, 서커스 단장을 맡고 있는 늑대인간, 항상 두 눈이 퀭하고 하는 말마다 정곡을 찌르는 괴짜 시인을 만난다. 게다가 성인 남자만한 물고기―빅피쉬―가 살았던 호수를 목격했다 하니, 그의 기이한 모험담은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
며느리는 에드워드의 이러한 모험담을 매우 즐겁게 듣는다. 그녀는 이야기의 진위 여부를 떠나 이야기 자체가 주는 즐거움을 누린다. 하지만 아들 윌은 달랐다.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아버지를 허풍쟁이라 단정해놓았고, 병상에서까지 그 증세가 호전되지 않음에 늘 불만이었다. 그의 심드렁한 태도와 삐딱함은 어쩌면 에드워드를 상처 입혔는지도 모르겠다. 며느리는, 윌과 에드워드를 화해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빚어진 오해라는 것은 당사자들이 바뀌지 않고서야 해결될 리 만무하나, 다행스럽게도 윌은 아버지에게 차츰 마음을 열어간다. 그러나 완전한 이해를 얻기도 전에 에드워드는 죽음을 맞이한다.
에드워드의 장례를 치르다가 윌은, 까무라칠 지경에 이른다. 에드워드가 생전에 읊었던 이야기 속 거인과 샴쌍둥이 쇼걸 자매와 늑대인간과 괴짜시인이 장례식장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들의 등장에 놀랐다는 것은 윌이 아직까지도 에드워드에 대한 백 프로의 신뢰가 없었다는 것의 반증이기도 하다. 그리고 동시에 윌은 백 프로의 ‘완전한 이해’를 하게 된다.
우리를 순수하게 감동시키는 것, 그것은 진실이 가진 가장 위대한 힘이다. 진실 앞에서 고집과 편견, 불평은 말을 잃는다.
나는 가끔, 하나님의 존재는 허상이면서 자신의 믿음만큼은 진실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을 본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그들의 믿음으로 만들어놓은 신이다. 그런 까닭에 그들의 믿음은 힘이 없다. 맹목적이고, 의지가 개입되고 위태로우며 그리하여 쉽게 바스라진다. 혹은 껍데기만 남게 된다. 그들의 경우처럼 무조건적으로 섬기고 숭배한다고 ‘진실이 아닌 것’이 ‘진실’이 될 리도 만무하고, 윌의 경우처럼 무시하고 비웃는다고 ‘진실’이 ‘진실이 아닌 것’도 아니다. 진실은 우리와는 상관없이 항상 그 자리에 놓여있다.
하여 나는 얼마나 행복한 자인가 다시금 돌아보게 된다.
‘예수는 그리스도이고 하나님은 여호와이시다’라는, 이 통렬한 진실을 올곧게 보고 듣고 믿는다는 것 믿을 수 있다는 것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행운이다. 세상과 맞설 수 있는 에너지, 세상의 풍파 속에 버티고 설 수 있는 뿌리는 여기에 있다. 한 시간 뒤도 예측할 수 없는 무능한 인간에게 이 진실은 얼마나 압도적인 위안이 되는지.
빅피쉬가 호기롭게 호수를 유영하다 사라지는 것으로 영화는 끝을 맺는다. 영화가 끝나고, 영화를 보던 시절이 오래 전임에도 아직까지 잔상이 머릿속에 생생히 펼쳐지는 것은, 진실의 힘과 더불어 팀버튼의 힘이 아닐까 한다. <빅피쉬>는 오래전에 동심을 잃은 어른들을 위한 꿈결같은 동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