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작성일 : 11-03-05 14:42 |
살아있음의 생생한 체험
<타임 투 리브>, <이키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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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가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는다. 남은 시간은 길어야 석 달 남짓. 패션 매거진의 능력 있는 포토 그래퍼였던 그는, 달라진 상황에서 새롭게 보이는 삶의 순간들을 포착하려 애쓴다. 그는 동성애자다. 죽음을 앞둔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공허하고 두려운 표정으로 카페에 앉아있는 그에게, 젊은 부부가 다가온다. 아이를 갖고 싶은데 불임인 자신들에게 정자를 제공해달라는 것. 말도 안 된다고 여기던 그는 고민 끝에 부부를 찾아간다. 여인의 배가 불러오는 것을 흐뭇함과 신기함으로 바라보며, 그는 해변가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는다. 죽기 전, 바다에 들어가 헤엄을 치기도 하고 해변에 누워 모래의 향과 모양을 음미하기도 하고 공을 놓친 소년에게 공을 건네주기도 한다. 그러니까 그에게 ‘살아있다’는 건, 물결의 파동을 감지하며 팔 다리를 휘저음이고, 발등에 비벼지는 모래알의 감촉이고, 공을 건네받는 소년과의 눈 맞춤이다. 죽음은, 사람들이 하나 둘씩 빠져나간 텅 빈 프레임 안에 홀로 누워있는 것. 쓸쓸하고 고독한, 영속적인 진공의 상태. 프랑소와 오종 감독의 <타임 투 리브>다.
이번엔 일본 영화 <이키가미>. 삶의 소중함을 알고, 열심히 살도록 -일하도록- 하기 위해, 국가는 0.1%의 선택적 사망자를 선택한다. 국가가 그들에게 선고하는 죽음을 목도하는 국민들은, 죽음의 공포가 주는 위력 앞에서 두려움으로 자신의 모든 일에 몰입하게 된다. 그들에게 ‘살아있다’는 건, 죽음과 대비되는 개념으로써의 삶이다. 선택적 사망자 본인과 그 가족의 에피소드가 엮인 하나의 이야기, <이키가미>.
작년 9월부터 지금까지 본의 아니게 투병(?)의 과정을 몸소 겪으면서 얻은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죽음을 볼 줄 아는 눈이다. 그럴듯하게 둘러대도 사실은 경험해 보지 않은 이의 <가짜 죽음>과, 밋밋하고 심드렁하게 툭 던져도 죽음의 문턱까지 가본 이의 <진짜 죽음>을 분명히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소설가 지망생에게 이 ‘매의 눈’과, 죽음에의 체험은 꼭 필요한 선물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시간을 주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지금도 그 시간은 여전히 떠올리기 싫고 징그럽고 끔찍하기만 하다. 아빠 말씀대로 개종이라도(!)하고 싶었지만 그조차 뜻대로 되자 않았다! 왜 개종이 안 되는 것이냐! 왜 하나님이 안 믿어지지 않는 것이냐! 흑흑 내 신앙수준은 고작 이 정도다.)
또 하나는, ‘살아있다’는 것의 생생한 체험이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지난 시간 동안, 삶이란 것에 대한 미세한 진동과 냄새를 샅샅이 느꼈던 것 같다. 고요하게 흘러가는 세월 속에서 관찰한 시간의 결, 희노애락, 기본적인 행위와 욕구들 그리고 일상. 살아가는 패턴은 개인마다 다르지만 꾸려가는 양상에는 항상 공통되는 공식이 있다. ‘단순성’. 삶의 메커니즘은 지극히 단순하다. 먹고-싸고-자고. 그 사이 사이에 일도 하고 사랑도 하고 공부도 한다. 그 공식을 몸으로 깨우쳤을 때의 허무함, 공허함, 서글픔 따위들. 사람이란 게 참 별 것 아니구나. 특별하고 엄청난 것도 반복되다 보면 평범한 게 되는구나. 부질없구나. 영원이 전제되지 않은 세계의 삶이란 건 참 슬프구나 하는 것들. 그럼에도 나는 이 세상에 대해 열렬한 애착과 고집을 갖고 있으며 비록 ‘허무하고 공허하고 서글프고 부질없’지만, 이 땅위에서의 삶이란 건 마약처럼 끊지 못할 데가 있구나. 하는 것들.
너무나 두려웠다. 이렇게 끝이 날까봐. 하고 싶은 것도, 해야 할 일도 많은데 그냥 끝나 버릴까봐. 그러나 더 두려웠던 건, 죽음 ‘이후’가 없다는 것에 대한 가정이었다. 영원이 없는 삶은 의미가 없다. 영원의 소망이 없는 삶은 그저 소비되기 위해 존재하는 하나의 물질일 뿐이다. 그런 삶은 정말, 의미가 없다. 물론 인간은 자체로 하나의 생명이고 존엄이다. 그들의 생을, 멋대로 무의미하다 결론짓는 건 오만이고 건방이고 독단임을 안다. 그러나 어쩔 수가 없다.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자들의 궁극은 빈껍데기일 뿐이다. 여호와를 알지 못한 채 당대의 지성이라 한들, 부호라 한들, 성인이라 한들 그것이 대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einmal ist keinmal」 ‘한 번 사는 것은 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라고, 밀란 쿤데라는 말했다. -그가 말한 의도와 내가 이해한 의도는 다를 수도 있겠지만- 저 문장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여호와로 잉태된 우리의 생은 그의 존재를 차근차근 배우고 힘입으며 지켜가는 데 의의가 있고, 이 땅에서의 삶이 마감한 후에는 영원 속에서 기쁨을 누리며 그를 찬양하는 데 의의가 있다.
아직은 어린 날, 그러나 누군가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늦었을지도 모를 나이에 내 삶을 점검하고 심지를 굳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그저 ‘사는 것’이 전부인 채로 그냥저냥 시시껄렁하게 살지 않도록 해주셔서 감사드린다. 소명을 주시고, 그 소명이 가슴 벅찬 감동과 용기를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 힘으로 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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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테일이 힘이다 |
인간에게, 죽음의 의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