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의 의미로움
<우먼 인 골드>
클림트의 ‘아델레’라는 명화는 주인공 마리아의 숙모를 모델로 한 그림으로, 나치의 오스트리아 침공 당시 강탈되어 박물관에 소장된 상태다. 마리아는 그 그림이 자신의 소유임을 명확히 하고자 새내기 변호사와 함께 소송을 시작한다. 소송은 개인 대 오스트리아 정부의 양상으로 무려 8년간이나 힘겹게 진행된다. 이길 수 없는 게임이라는 게 불 보듯 뻔하다.
‘아델레’라는 그림 한 점에는 마리아와 마리아 집 안의 이야기가 있다. 그 그림은 그 시절의 에피소드, 추억 같은 것이 고스란히 녹아든 소중한 오브제이다. 그것이 비록 ‘오스트리아의 모나리자’로 대표되는, 국가적으로 상징적인 작품이라 할지라도 분명 개인의 소유권이 우선 존중돼야 하는 게 맞다. 더군다나 나치에게 수탈당한 물건이지 않은가. 이쪽의 의사 같은 건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은 채 눈앞에서 제멋대로 빼앗아 버린 양아치 짓을 국가가 묵인한다는 건 그 나라의 수준을 드러내는 것과 진배없으니 말이다.
‘아델레’를 되찾기 위한 여정 속에서 마리아가 다시 밟은 고국 땅 오스트리아. 이제는 많이 바뀌었지만, 그곳 건물들을 둘러보고 낡은 문을 어루만지며 그녀는 젊은 시절로 돌아간다. 예술의 향기를 음미할 줄 아는 식구들, 집 안에서 올린 자신의 결혼식, 아버지의 첼로 연주… 장소와 공간은, 우리에게 그 시절로 불러들이는 힘이 있다.
물건도 마찬가지다. 소유물에도 역시 고유한 시간과 의미와 정서가 있다. 처음 그 물건을 가질 때의 기분과 상황, 함께 있었던 사람, 갖게 된 이유, 갖고 난 후의 즐거움이 있다. 시간이 지나 그 물건과 함께 나이가 들며 생기는 애착과 정감이 있고 그로 인해 형성된 정서가 있다. 그 모든 걸 통틀어 개인과 물건 간의 역사라 할 수 있겠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미학적인 즐거움을 주거나 혹은 대수롭지 않게 지나치는 오브제 중 하나일지 몰라도, 개인의 ‘역사’가 개입되어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마리아가 고통받는 부분은 바로 그 지점이다. 물건과 자신의 긴밀한 관계가 타인에 의해 무참히 단절되는 지점. ‘아델라’를 돌려받고서야 비로소 마리아의 기억 속 멈춰 있던 인물들이 생동감 있게 웃고 움직이기 시작한다.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옥보다 끔찍한 악몽으로 남아있던 고국과 그곳에서의 일들, 사랑했던 사람들이 마리아와 함께 평온을 되찾은 것이다. ‘아델라’의 시가가 100억이 넘고 말고는 마리아에게 중요한 일이 아니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단 하나다. 바로, ‘의미’.
당신이 가장 ‘의미’있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의미’있는 것 때문에 죽을 만큼 고통받고, 때론 환희에 차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기쁨을 맛본 적이 있는지. 그걸 위해 무엇을 했고 어떤 것들을 쌓아왔는지. 그리하여 내게 어떤 보답을 하고 있는지.
나에게는 의미 그 자체로 이루어진 일과 의미이자 전부인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살아가는 데 힘을 받는다. 삶에서 마주치는 사소한 순간마다 의지를 다질 수 있는 건 그 때문이다.
한 번은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내가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사라진다면 과연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을까 하고. 고심한 결과 ‘NO’였다. 고심하지 않아도 ‘아니오’였다. 의미를 잃은 삶을 사는 것은, 껍데기의 수명만 연장하는 일에 불과하다. 물론 그 때가 되면 어떠한 마음과 상황이 생길 거고, 육체적 삶의 무용함을 이야기하는 것이 불신앙적인 태도일는지 모르겠지만 어떻게 이 막막하고 무서운 세상에서 의미라는 좌표를 잃고 살 수 있을지 도통 자신이 안 생긴다.
그렇지만 다행히 그럴 일은 없다. 의미의 중심에 있는 것은 여호와이기 때문이다. 변하고 사라지는 것들 위에 있는 분이 나를 붙들고 이끌어 주시기에. 물론 이렇게 의미있다고 여기는 데 비해 나의 태도는 참 연약하고 쉽게 무너지기 그지없지만.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였는데, 아직도 원래의 주인에게 돌아가지 못하고 박물관에 전시된 작품들이 10만여 점이나 된다고 한다. 모든 것들이, 본래의 주인에게 본래 속해 있던 곳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